끝없이 펼쳐진 짙은 색의 푸름과 맞닿은 곳엔 연한 파란색의 하늘이 있다. 둘을 구별 짓는 일자의 선, 어딘가부터 조용하게 다가오다가 나의 눈에 담길 때쯤에는 거친 파도로 변하고, 이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얗게 부서진다.
어느 날 아침 훌쩍 떠나서 두 시간 남짓 차를 타고나면 어디선가 짭조름한 냄새가 먼저 마중 나왔다가 이내 푸른빛의 바다를 만나게 해 준다. 와이프와 함께 이번주에 어디 가볼까? 하는 대화를 하다 보면 나는 바로 바다를 이야기한다. 물론 실행은 별로 못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자주 바다를 갔던 것 같다.
네다섯 시간을 달려서 가본 통영의 남해바다와 경주의 동해바다, 삼척의 동해바다, 속초의 동해바다, 강릉의 동해바다, 양양의 동해바다, 고성의 동해바다...
그렇다. 나는 동해바다를 좋아한다. 자주 가서 그런 건지, 익숙한 길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찾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처럼 동해바다이다. (왠지 동해바다의 파도소리가 서해바다의 파도소리보다 클 것 같아서... 인 이유도 있다.)
먼바다를 보며 해변의 모래를 밟고 걸어가다 보면 어느샌가부터 많은 고민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태어나기 전에 있던 고민들까지 고민하는 모습이다. 멍한 눈길로 바다와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조용히 다가온 와이프가 한마디를 한다.
“어차피 고민해도 쓸모없어”
어떨 때는 한없이 소심한 사람 같으면서, 어떨 때에는 한없이 쿨한 사람이다. 저 파도의 모습처럼 변화무쌍하다.
저 멀리서 조용히 다가오다가 해변가의 바위나 절벽에 부딪혀내는 파도소리를 좋아한다. 그 소리가 나의 뇌파와 맞는 것인지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파도의 움직임에 눈을 맡기며, 파도소리와 나의 뇌파가 같은 주파수로 움직이는듯한 느낌이 들 때면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평온해진다.
21시가 되기 전 잠이 든다. 새벽 5시 전후로 눈을 뜬다. 창문밖으로 살짝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본다. 점점 진해지는 주홍빛 물결사이로 조용히 떠가는 작은 어선이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평면처럼 보이는 끝없는 바다가 보여주는 것은 여유인가 여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여러 색깔은 필요 없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마음이 좀 더 상쾌해지는 것 같다.
조용히 바다 앞에 서있으면 시원한 바람에 위로받고, 내 앞에서 부서지는 파도에 온갖 고민을 얹어 떠나보내고, 끝없이 넓게 펼쳐진 광경에 희망을 품어보게 해 준다. 다른 물들에 비해 이상하게 바다에게는 많은 것들을 기대한다.
이렇게 나의 바다를 마무리하고 다시 꽉꽉 채워진 도시로, 나의 삶으로 돌아온다. 얼마 안 되는 시간 속에 다시 그 바다를, 그 여유를, 그 여백을, 그리워하게 되지만 애써 억누르고 마음속으로 기억해 보며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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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예상보다 더 깊게 파고들고, 더 멀리 밀려간다. 밀려갈 때는 영영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발밑에 와 있다. 우리 삶에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책 모든 삶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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