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의 시작, 베이스캠프

길을 잃은 내가 되돌아온 곳

by 리을
모닝 페이지가 당신의 어린 아티스트를 살뜰히 챙겨 줄 것이다. 그러니 아침마다 뭐가 됐든 떠오르는 대로 세 쪽을 채워라. 그게 전부다. 쓸 만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쓸 만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써라. 세 쪽을 다 채울 때까지 무슨 말이든 써라. - 아티스트 웨이 43p -


삐삐삐-


내 보통의 아침은 자비 없는 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매일 맞이하면서도 아침 알람은 언제나 낯설다. 따가운 눈으로 알람을 끄고 나면, 곧바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몇 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에 편안한 자세를 찾아 뒤척인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 같던 잠이 갑자기 줄다리기를 해댄다. 더 잘래? 말래? 잠시 그렇게 농락을 당하다, 번쩍 눈을 뜬다. 여전히 눈은 제대로 떠지지 않지만, 몸을 일으켜 작은 방으로 향한다. 눈곱도 떼지 않은 채, 굴러다니는 펜을 붙잡고 노트에 아무 말이나 적는다.


- 눈이 따갑도록 건조하다. 오늘따라 유독 쓰기 싫다. 귀찮다. 펜을 잡은 손가락이 아프다.


쓸모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이는 글자를 꾹꾹 눌러 담는다. 떠오르는 불평을 받아내다 보면, 한쪽을 금방 채울 수 있다. 그렇게 출근 걱정, 청소 걱정, 뻐근한 몸에 대해 푸념하다 세 쪽을 완성하기도 한다. 요즘 아침마다 다시 모닝 페이지를 적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시작된 이 아침이 반갑기만 하다.






21년 11월 22일 월요일, '충동적으로 챌린지에 참여했다'라는 문장으로 나의 첫 모닝 페이지는 시작되었다. 잠시 읽다 보니 당시의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이직이었는데 달갑지 않은 현실이 펼쳐졌다. 불안정한 신생 회사는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고, 맡게 된 업무도 생각과 달라 혼란스러웠다. '고작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무엇보다 전 직장에서 나를 아껴주던 상사가 몇 번이고 붙잡았던 일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왔는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았다. 후회로 회사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보니 일상도 변해갔다. 싫어하는 것들은 늘어만 갔고, 무언가를 좋아했던 감정은 사라져갔다.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쉬는 날에도 그저 하염없이 누워만 있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SNS에서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과 만났다. 발췌된 문장들을 훑어보다 계속 읽고 싶은 마음에 책을 샀다. 그때부터였다. 무료했던 일상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책을 읽는 내내 와닿는 문장이 너무도 많았다. 빠르게 책을 훑고, 빈 노트 하나를 꺼내 모닝 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책 덕분에 아침마다 세 쪽을 꾸역꾸역 적었지만,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부분 푸념과 고민을 한가득 적었고, 이상한 꿈이라도 꾼 날에는 꿈 이야기만 내내 적기도 했다. 희망적으로 몇 줄 쓰다가도, 금세 비관적으로 변했고, 또 어떻게든 하루를 견뎌보자고 마무리 지었다. 찰나의 순간에도 제 멋대로 요동치는 생각을 그저 받아썼다. 왜 쓰는지,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도움이 된다는 저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싶었다.


일을 쉬면서 글 쓰는 일에만 매달려 있던 적도 있었다. 그때도 관성처럼 모닝 페이지를 적었지만, 그 쓸모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책의 예시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말을 걸어오거나, 막혀있던 부분을 해결해 줄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하거나, 마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이야기를 썼다. 그 모두가 적나라하게 모닝 페이지에 담겼다. 그리고 쓰고 싶지 않아졌다. 글쓰기로 괴로워하는 나를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쓰기 싫다는 문장만 몇 줄씩 적다가 노트를 여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어느새 노트의 위치도 모를 만큼 모닝 페이지 없는 아침이 자연스러워졌다. 노트와 멀어진 만큼 글을 쓰는 일상과도 멀어졌다. 쓰지 않아도 하루는 바삐 흘러갔다. 아침마다 전쟁처럼 치러지는 출근, 퇴근 후에는 친구를 만났고, 주말이면 캠핑장으로 떠났다. 잘 쓰려고 아등바등했던 순간과 멀어져 보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어쩌면 적성에 맞지도 않는 글을 쓰는 것보다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지금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될수록 나는 글쓰기를 떠올렸다. 멋진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좋은 책을 만나 남편에게 전해줄 때도, 이야기가 있는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쓰고 싶었다.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그냥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불쑥불쑥 찾아왔다. 매번 쓰는 행위가 쓸모없다고 의심하고, 혼자 쓰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지 잘 알면서, 잘 쓰고 싶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도망쳤으면서, 쓰고만 싶었다.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한 나는 다시 '아티스트 웨이'를 꺼냈다. 그리고 1년여 만에 모닝 페이지를 펼쳤다. 따가운 눈을 억지로 크게 뜨고, 작은 방에 앉아 스치는 생각을 받아적었다. 잘 쓰려는 마음 없이, 머리에 생각나는 것들을 그대로 옮겼다. 그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쓸 수 있었다. 비록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짧은 단상일지라도, 한 글자도 적지 않던 내게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쓰지 않은 날을 포함해 4년 가까이 모닝 페이지를 쓰고 있다. 어느덧 다섯 권이 된 노트에는 하루의 고민과 기쁨,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또 필사적으로 달아났던 지난날까지 빼곡히 담겨있다.


글쓰기는 긴 탐험과도 같다. 즐거운 순간도 있지만 괴로운 순간도 못지않게 존재한다. 기나긴 탐험은 경험이 있어도 쉽지 않다. 오히려 쓸수록 부담감에 짓눌려 그만두게 되기도 한다. 바로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던 동굴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를 생생하게 겪었다. 여정을 끝냈다는 즐거움도 잠시, 새로운 동굴 앞에서 두려움에 얼어버렸다. 한 발짝 내딛기도 어려울 때면, 이유도 없이 모닝 페이지가 떠올랐다. 어떻게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를 그 노트 앞으로 데려다 놓고 싶었다.


삐뚤빼뚤 걸어온 나의 여정을 멀리서 바라보면, 모닝 페이지는 베이스캠프와 같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는 쉴 곳이 되어주고, 길을 잃었을 때는 기점이 되어주고, 도망쳤다 다시 돌아온 나에겐 기꺼이 그 시작점이 되어주었다. 이유도 모르면서 계속 모닝 페이지를 쓰고 싶었던 건, 내 안의 잠들어 있던 아티스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요령도 없이 쓰고 싶은 마음만으로 나는 글을 쓴다. 새롭게 시작될 탐험이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하지만 등 뒤에 모닝 페이지라는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도 같은 새로운 탐험에서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첫 번째 기록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