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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지 Apr 18. 2023

숨어서 하는 산책



숨어서 하는 산책



 불곰이 나를 불렀다.

 

 얼음 동굴 갈래?


곰이 동굴을 가자고 말하고 있다.


오늘 아침 불곰은 오이를 팔고 있었다. 저녁 먹고 오이 베어 물면 남편 간식으로 딱이죠. 다이어트에도 좋고요. 아. 안 되겠네요. 사지 마. 사지 마. 남의 편 뭐가 예쁘다고 간식까지 사줘. 그렇지? 사람이 인간미가 있어야지. 그냥 오늘은 달걀이나 사서 남편보고 계란프라이나 해 먹으라고 그래. 이게 요즘 말하는 반존대라는 건가? 불곰의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푸하하 웃으며 오이도 사고 달걀도 샀다. 그런 불곰이 휴게실 뒷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를 재촉하고 있다. 마치 오이를 판촉 하는 것처럼.


 나 보여 줄 게 있다. 따라와 줄래?


 여기는 얼음 창고 가는 길이 아닌데요.


 너 맨날 가던 길로만 가는 타입이구나.


 보통 사람들 다 그러지 않나요.


불곰은 점점 좁은 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음 창고가 있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긴 길이 없는데요.


 길은 내면 되는 거지.


 풀이 얼굴에 쓸렸다. 도소매 마트가 작게 보였다. 자동차 전조등이 반딧 불빛으로 보였다. 내가 곰에게 홀린 걸까. 시간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선이 아니고 점으로. 원자 덩어리로. 쿼크로 작아지고 있었다. 풀 숲을 헤쳐 나오니 거대한 컨테이너 창고가 보였다. 새벽에 배송된 채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초록의 세계. 채소들은 수증기를 맞으며 잠을 잘 뿐이다. 사람이 보고 싶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럴 때 이곳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싱싱한 상추를 보니 삼겹살을 먹고 싶었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더라? 그런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생존을 위한 섭취는 없어진 지 오래니까.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람을 아는 척하는 기분이 들 때 난 여기에 와. 얼음 동굴이라는 이름 잘 어울리지 않니.


 왜 알려준 거예요?


 나도 너 같을 때가 있었으니까.


 나 같은 게 뭐죠?


 네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불곰은 갑자기 얼음 창고의 브로콜리, 상추, 고수 코너를 지나가더니 구석에 자리 잡은 오래된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어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낸다. 담배를 피웠으니 입 안이 퍼석한 나는 그가 건네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천천히 녹여 먹으려다 혀가 얼음에 달라붙는다. 까드득. 그가 하드를 씹어먹었다.


 어이 잘 파시던데요.


 어이?

 

 어이여.


 오이?


 녜.


 그 아줌마는 오이를 사러 온 게 아니야.


 나는 도통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소매 마트에 채소를 사러 오는 게 아니면 뭐라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문장을 만들어보았다.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건 아니야. 사랑을 하려고 연애를 하는 건 아니야. 똑똑해지려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니야. 혓바닥이 얼음 덩어리에서 떨어졌다. 단 걸 먹으려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아니야. 불곰은 원래 일본어 학원의 강사였고 한다. 처음부터 일본어 강사를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가 대학생 시절에는 10만 원으로 일본 여행 다녀오기 같은 여행 프로모션이 유행이었다. 저렴하게 외국을 다녀올 수 있다니. 평소에 애니메이션을 많이 봐서 일본어가 들렸다고 한다. 그가 짧게 외국어를 건네면 그들은 그를 칭찬해 줬다. 일본어를 정말 잘하시는군요. 일본인들의 알맹이 없는 칭찬을 그는 믿었다고 한다. 내가 일본어를 정말 잘하는구나. 그 뒤로 한국에 와서 일본어를 배웠다. 어느 정도 프리 토킹과 자격증 시험에 능통해졌을 때 즈음 코로나가 터졌고. 그는 성인 일본어 학원 강사를 겸임했다. 성인반 수업을 1년 정도 했을 때 친해진 학생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고.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은 정말 차우차우를 닮으셨어요. 그때 불곰은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불곰은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만 마트 캐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도망가려고 했다고. 아무 의미 없이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것에 질려서 웅녀처럼 마늘을 먹으며 사람이 될 때까지 혼자 있으려고 했다고 한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자 그는 일을 하기 시작했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하나 깨달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면 채소가 바구니에 담긴다는 것. 관심이 없어도 관심이 있는 척해야 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 아무 말도 하기 싫을 땐 얼음 창고에 오는데 오늘따라 이 적막함은 불곰에게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 조금만 있으면 사람이 될 것 같은데도 못 버틸 것 같았다고. 그때 내가 보였다고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가.


 그제야 그가 불곰이 아니고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늘 코너를 돌아 삐그덕 거리는 벤치에 앉는다. 차우차우를 닮은 사람, 어느 새 반달가슴곰이 된 남자는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은 반달가슴곰에게 얼린 아이스크림을 주고. 곰은 천천히 녹여 먹다가 혀가 달라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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