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보낼 용기] 송지영 지음
아직은 내 자리라며 우기는 봄을, 일찍 도착한 여름이 엉덩이를 들이밀며 합석을 이루던 계절이었다.
지난 5월 어느 날.
브런치 새내기는 오늘도 키보드 봇짐을 매고 글방투어를 나선다.
동네 지리도 익혀야 하고, 노는 물도 확인하며, 내비도 안 켜고 발 닿는 데로 이방 저 방 기웃거린다.
그러다, 너무도 우아한 글에 발길을 멈춘다.
<단 10명만 들어갈 수 있는 경주 한옥미술관>
종종거리며 하루를 살아온 나에게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신세계였고,
늦은 밤 댓글과 구독을 남기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맞구독.
이렇게 브런치 [송지영 작가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대구 간송미술관, 양산 몽유재, 괴테의 집- 여주 여백서원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미술관 사모님'으로 내 맘대로 단정 지었다.
여름에게도 똑같이 일이 다가왔다.
계절의 숫자를 앞세워 달려온 가을 앞에, 여름은 합석을 거부하고 남겨진 파워를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던, 지난 10월.
브런치 '작가의 꿈' 이벤트에 응모한 그녀, 송지영 작가님의 글이 띵동~ 알림과 함께 도착했다.
작가 프로필 확인하기를 여러 번, 미술관 사모님으로 박혀있던 그녀의 깊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구독 이후의 발행되는 글들도 따라가기 바쁜 날들이었기에, 이전 글을 들춰볼 생각을 못했는데 어마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열일곱 꽃같이 예쁜 딸을 잃은 자살유가족입니다.
깊은 밤 조심스레 찾아 간, 그녀의 브런치북 대문에서 턱--하고 가슴이 막혀온다.
<1화. 꿈이라고 해줘요>를 숨죽여 읽고 몇 시간을 깜깜한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도둑이 아닌 이상 재산과도 같은 글을 훔쳐 읽었으니 그냥 올 수는 없다.
하지만 라이킷을 눌러야 할지, 댓글을 달고 나와야 할지, 댓글을 남긴다면 뭐라고 남겨야 할지.
옳아야 하는 일 앞에서, 모든 것이 옳지 않은 일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갈등하는 도둑이 되어 5편을 읽고, 떨어지지 않는 손길로 브런치북을 덮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이 되면 정식으로 마주하자.
그렇게 기다린 날은 다가왔다. 예약 판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주문한 책이 금요일 왔다.
나는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서진아, 안녕?
<딸을 잃은 자살 사별자 엄마의 기록>
표지에 별처럼 반짝이며 적혀있는 문장 그대로, 이 책은 그저 읽기에도 찬란한 열일곱 딸, 서진이를 보낸 엄마의 기록이다.
자살은 누군가의 약함 때문이 아니다.
더는 붙들 것도, 기다릴 것도 남지 않은 끝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p124)
순식간에 세상의 공기가 바뀌었다.
내 인생은 네가 떠남과 동시에 끝났다고, 이 슬픔만큼 어두운 장례식장에 앉아 끝없이 되뇌었다.
나는 낳고 기를 줄만 알았지, 아이를 보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p29)
책이 도착한 금요일밤 첫 장을 펴고, 꼬박 밤을 새우고, 토요일 밤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일요일 밤이다.
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았던 고민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표지에서 환하게 밝히고 있는 한 줄,
열일곱 딸을 보낸 엄마의 기록에 '또 다른 기록'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한 줄 뿐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마음이라던가, 상처라든가, 아픔, 눈물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기로 한다.
그건 서진이도, 서진이를 보낸 엄마도 원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서진이와 엄마가 함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을 들었다.
서진이와 우리 딸은 같은 나이, 동갑이다.
캠퍼스커플로 만난 부부, 흔히 200점이라는 오빠, 다음에 사랑스러운 딸. 공통분모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밝고 유쾌하며 춤도 잘 추고 어딜 가나 칭찬을 받는 서진이와 우리 딸이 닮았다.
그 시절의 서진이는, 사춘기와 우울감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거리 두기와 침묵을 아이들이 자기 세계를 지키는 통과의례쯤으로 나는 이해했다.
지나친 간섭보다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이 더 나은 보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오히려 아이의 아픔을 가리는 베일이 되고 말았다. (p82)
활발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 딸도 중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팬데믹 거리 두기로 자연스럽게 방콕 생활이 시작이 되었고, 발 빠른 학원들은 줌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는 어느 날부터 줌 모니터에 자신을 블랙으로 처리하고, 숨기 시작했다.
"나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보호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통과의례라고 넘겼는데.."
"오늘은 어땠어?"
"괜찮았어요."
언제나 같았던 그 짧은 대답을 나는 과신했다.
서진이의 '괜찮아요'는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라는 슬픈 언어였다.
그 안에 숨죽이고 있던 미세한 균열들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p84)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특강수업을 마치고 11시가 되어 들어오는 딸에게 젠틀한 나만의 인사말을 건넸다.
"딸~ 오늘은 어땠어?"
"괜찮았어."
오늘 뭐 했어? 공부 많이 했어? 이렇게 날것의 질문이 아닌 한 번은 정형화한 질문에 대한 맞춤 대답이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뭐가 괜찮았는지... 물어봤어야 했나. 아니면 질문을 바꿨어야 했나. 오늘 기분은 어때?라고."
아니면 "우리 딸 얼굴, 30초만 바라보자."며 눈 맞추기를 시도해 볼까. 과제가 늘고 있다.
예약된 진료를 받기로 한 날, 나는 서진이 모르게 간호사에게 메모를 건네 의사 선생님과 먼저 면담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서진이의 지난 한 주를 찬찬히 들은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서진이와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의사 선생님의 질문은 오래 잠복해 있던 통증들을 정확히 되살렸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녀가 건넨 휴지를 받아 들고,
나는 더듬듯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친하다고는... 못 하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이가요... 말을 안 해요. 저와 나누는 언어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p77, 79)
이 질문을 나에게도 해보았다.
나는 아이와 친한가? 친했던 것일까? 친한 상태로 있는 것일까?
아이는 나를 친하다고 생각할까? 아이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겁이 나는 이유는 무얼까.
"친하다는 것은 친구 같다는 건데, 내가 친구처럼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나? 우리는 친한 걸까?"
정성으로 키운 아이는 결국 다 잘된다고들 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을 감싸 안아, 어떤 어려움도 반드시 견디게 해 줄 거라 했다.
이 말은 거짓이었다.
사랑으로 키워도, 아이는 떠났다.
우리는 늘 아이 곁에 있었지만, 아이가 기댈 부모가 되지는 못했다.
병을 알게 되었지만, 낫게 해주진 못했다. (p33)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13년째 '자살'이고, 2019년 이후 십 대 자살률이 34퍼센트나 높아졌는데도,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자식만은 아니길 바라는 건, 모든 부모가 가슴 깊이 감추고 있는 은밀한 기원이다.
나 역시 이 통계가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리라곤 단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했다.
끝까지 믿고 싶었던 내 아이는 다를 거라는 확신은, 마지막까지 붙든 허약한 방패였다. (p112)
이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자식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어쩌면 나도 설마... 하는 마음뒤에 숨어, 눈 감고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그러고 있다.
그럼에도 상실을 품고 살아나는 일은 끝내 완결될 수 없는 슬픔이다.
애도는 눈물로 닫히는 문이 아니라, 날마다 열어야 하는 창문과도 같다.
나는 남겨진 자로서 어제보다 덜 원망하고, 오늘을 조금 더 살아내는 선택을 한다.
삶은 이런 다짐들이 모여 나를 내일로 이끈다.
그 결심의 끝에서 나는 우리 가족의 비극을 우리만의 비밀로 가두는 대신, 모두의 과제로 내어놓는다. (p10)
이 책은 딸을 먼저 보낸 엄마의 '수기'가 아니다.
자신이 겪은 일과 감정을 엮은 에세이도 아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켜가며 또박또박 낭독하는 오디오북 같기도 하다.
송지영 작가님의 담담한 필력이 더해져, 한 편의 소설을 마친 느낌이 든다.
1장 꿈이라고 해줘요
2장 떠나기를 결심하는 아이들
3장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목차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삶의 회복과 재건'에 대한 이야기로 향해간다.
나 자신이 겪은 비극을 하나의 수치라도 줄이기 위해 어디라도 손을 내미는 엄마이자 작가의 모습은
아마도 브런치북 이후의 이야기가 아닐까 예상해 본다.
(5화까지 도둑 독서를 했지만, 실제 책에서는 다르게 시작한다.)
각자의 입장과 마음이 다르겠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되도록~ 많은 분들이.
욕심을 덜어낸다면~ 부모라면 한 번쯤은.
강조 한 줄을 얹는다면~ 자신의 아이를 언급함에 '사춘기'라는 단어를 넣는 부모는 필수.
나는 이 책을 통해
서진이와 서진이 어머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었다.
"그냥 흘리지 말고, 괜찮을 거라 넘기지 말고, 한번 더 바라봐주세요."
나에게 내 아이를 다시,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나와 나의 딸에게 '기회'를 주었고,
우리는 얻은 '기회'를 소중하게 사용할 것이다.
이제 우리만의 방식으로 아이를 다시 한번 보내 줄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그날 나도 용기 내어 딸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엄마의 끝없는 슬픔이어서는 안 돼.
끝없이 번져가는 사랑이었으면 해.
어디서든, 너의 빛과 나의 빛이 서로를 향해 비출 수 있기를. (p207)
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제발 소설이기를 바라면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