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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코드 Nov 11. 2024

섬유로 본 문명사, 《패브릭》

독특한 관점, 단단한 논거, 풍요로운 결말


자기만의 관점을 유지한다는 것, 중요한 일이다. 그 관점이 보편적인 가치를 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고작 마스터베이션에 그칠 요량이라면 고이 가슴에 담아두거나 가까운 친구에게 의탁하는 편이 적당하다. 자칫 천지 분간이 안 되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상당하므로.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처음 보듯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배면을 읽으려 하는 건데 이번엔 걸핏하면 잊어서 문제다. 익숙한 것에 무감각한 태도. 이 부분에 경종을 울린 책을 손에 넣고 평소보다 생각이 많아졌다. 주인공은 《패브릭》이다. 버지니아 포스트렐이 썼다. 《글래머의 힘》으로 이목을 끈 작가다.



인류 문명사를 다룬 책들은 많다. 연대기 순으로 문명사를 다루면 손쉽기야 하겠지만 주의를 끌기가 쉽지 않다. 같은 유형의 책들이 시중에 워낙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변화의 기류에 기폭제가 되었다. 백화점식 문명사에서 벗어나 특정 사물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문명사를 기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뒤 그 기조가 흔들린 적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같은 기조의 주목할 만한 저작으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에서 사이토 다카시는 세월을 거치며 역할을 다한 거로 보이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꼼꼼히 서술하는가 하면, 사랑과 관용의 종교가 제국의 첨병 노릇을 하고 세계적인 분쟁의 불씨가 된 배경에 어떤 것이 있는지 등 논쟁적인 주제를 비켜가지 않았다. 유럽에서 태동한 근대화가 필연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한 탄탄한 논거에 매료된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한정된 분량 안에 많은 주제를 담다 보니 깊이가 부족한 면이 없잖았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책들이 연일 출간되고 있었으므로 그 흠이 크게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사이토 다카시는 ‘다섯 가지 힘’으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를 꼽았다.



《패브릭은》 특정 사물이나 관념을 주조로 문명사를 기술하려는 일련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 작품이다. 버지니아 포스트렐은 “직물 원료나 제작자, 시장 등 문명의 특성이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요소”를 씨줄로 삼아 베틀에 올려놓았다. 날줄은 섬유, 실, 직물, 염료, 상인, 소비자, 혁신자였다. 베는 씨줄과 날줄을 엇갈려가며 짠다. 주의를 등한히 하거나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하면 자칫 성긴 옷이 되기 십상이다. 좋은 베일수록 씨줄과 날줄이 공교히 엮여있어야 한다. 직물이 문명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이유에 관해 이보다 설득력 있는 진술이 있을까 싶은 문장을 소개한다. 물론 저자가 썼다. “우리가 석기시대로 부르는 시기는 사실 끈 시대로 불러도 무리가 없다. 선사시대의 이 두 가지 기술은 말 그대로 서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는 돌도끼에 끈으로 손잡이를 묶어 도끼와 창을 만들었다.” 이제 겨우 10여 장을 읽었을 뿐이다. 설득은 진즉 당했고 이제 끌려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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