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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목사 그리고 부자

예수신앙에 대한 21세기적 해석

by 자본주의 해커톤

기독교는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욕망을 사후세계로 넘기면서 하느님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위로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부자가 아니기에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도 권력자들은 스토아 학파, 조로아스터교 등의 자아실현 중심의 종교가 주류였다.

자존감이 높고, 부와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해당 철학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본인의 자아실현에 가까운 철학이였다.


반면 부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서민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목숨과 경제적 도움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을 변화시켜 줄(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각성하지 못하는 대다수)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찾게 된다.

말 그대로 대리인, 영도자, 정치인, 심부름꾼, 지도자, 하인, 메시아, 구세주 등등


이런 철학의 집대성이 바오로였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직계제자로 플라톤이 있었고.

예수에게는 생전엔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영적 제자를 자처하는 바오로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나, 예수의 십자가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부분의 공통점과

제자들이 스승과 해당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철학과 종교의 집대성이 이루어졌다.

플라톤철학의 정수는 기독교 철학으로 상속되었다. (이데아, 천당과 지옥 등의 이분법은 플라톤 철학의 골간이다. )


기독교는 가난을 사후부자의 약속처럼 포장하면서 현실 세계의 물적부족상태를 위로했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당연히 부자보다 빈자가 많다.

부자는 부의 집중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부의 집중은 부가가치의 극대화나 금융자산의 확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첫째, 부가가치의 창출은 남들과 다른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경쟁우위를 계속 유지하는 경영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단적으로 사업인데 사업가대 노동자의 비율만큼이나 부자와 빈자의 비율이 비슷하다.


둘째, 금융자산의 극대화는 자본주의 경기의 확장과 긴축, 신기술의 발명 등에 투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사후의 부자에 대한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주어야 하는가?"

예수시절 식민지 경제의 기본은 생산물은 로마에 지배되거나 바리세이파 등의 종교인들에게 귀속되었다.

예루살렘이나 나자렛지방은 척박한 토양으로 변변한 산업이라곤 포도농사나 어부 생활로 연명했으리라. 또한 잉여는 로마나 종교인들에게 세금으로 착취당했을 것이다. 스스로 경제적 부를 달성할 수단이 절망적일 정도로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에 예수는 정신승리의 방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희망감과 행복감을 복음으로 전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경제는 어떤가?

부자와 가난한 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정치적 자유와 기회의 평등은 2000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부와 가난을 극복하는 다양한 수단이 존재하고 활용할 수 있다.

사후 세계의 부와 권력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의 실질적인 승리도 거두고, 사후에도 지옥과 천당이 있다면 그 상황 적응해서 또 살아가면 될 일이 아닌가? (지옥의 불길 속에 타 죽는 다면 죽고 나서 또 죽는 것이고, 죽지 않으면 내성이 생길 것이 아닌가?)


신부는 카톡릭의 조직원, 목사는 기독교의 조직원이 아닌가.

그리스도 예수는 총론은 비슷할지라도 각론에서 해당 조직별 해석을 달리하면서 조직이 갈린다.

기본적으로는 신구약 성서를 콘텍스트로 부활신앙에 기초하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후 천당에 대한 약속이 기본이다.


빈자와 서민들에 대한 연민을 현실세계에서 실현시켜 주겠다는 정치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 약속을 실현하기 어렵다.

반대 세력과 이해집단 간의 전쟁이 이를 불가능토록 만들 것이고, 가능하더러도 굉장히 더디다.


예수도 정치인이다. 경제인은 아니었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부자로 만들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00년 동안 세상과 경제구조가 변화되었다.

이제는 현실세계에서 빈자를 부자로 만들어줄 21세기 예수가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예수는 현실세계의 부자와 사후세계의 부자를 통섭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라면, 너라면, 우리라면, 조직이라면, 국가라면, 세계라면....

자본주의 목사들이 서울 밤하늘 붉게 번쩍이는 십자가만큼 많아진다면... 삶과 죽음 속에 양립하는 부의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이미 종교화 되지 않았는가?

21세기 자본주의 선교사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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