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르빼기와 석유냄새

2부 - 장지동 사람들

by 규아

장지동 연립의 여름은 소독차가 남긴 뽀얀 연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연기를 향해 달렸고, 비명은 웃음으로 흩어졌다. 겨울이면 연탄재가 굴러다녔다. 눈은 금세 더러워졌고, 아이들은 그 위를 구르며 놀았다. 늘 소란스러웠다.


연립의 한가운데 지형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늘 새하얀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동네 어른들 곁에 딱 붙어 매의 눈을 하고 서 있던 아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바가지 단발머리에 속을 알 수 없는 작은 눈을 반짝이던 지형이는, 아이들이 땀 냄새와 흙먼지에 절어갈 때 혼자서만 비누 냄새를 풍겼다.

어른들에게 지형이는 ‘뉘 집 자식인지 참 참하다’는 칭찬을 독차지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지형이는 이름 대신 사투리로 ‘일르빼기’라 불렸다.


지형이는 타인의 허물 위에서 자신의 청결함을 증명하는 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 민정이가 몰래 군것질이라도 하면 지영이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어른들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민정이가 아까 뭘 먹던데, 배탈 날까 봐 걱정돼요.” 걱정을 가장한 밀고. 그 한마디에 주변 아이들은 졸지에 말 안 듣는 아이가 되었고, 지형이는 친구를 걱정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동네에 자자한 그 칭찬을 유지하기 위해 주형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또래들의 철없는 행동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가끔 민정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불량식품을 사 먹거나, 거친 말을 내뱉을 때면 엄마는 마치 곁에서 지켜본 듯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형이가 사사건건 일러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일르빼기를 멀리할수록, 지영이와 어른들의 사이는 더 단단하게 밀착되었다.

한번은 지형이가 자기 집에서 놀자고 제안을 했다. 민정이가 책장에 꽂힌 동화책에서 피노키오가 갇힌 고래 뱃속 이야기에 심취해있을 때였다. 지형이가 식탁 의자들 위에 이불을 덮어씌우며 텐트 놀이를 시작했고, 고래 뱃속에 갇힌 듯한 환상이 들자 민정이는 신이 났다.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며 이불이 펄럭였고, 집안은 어질러졌다. 결국 물병이 엎어지며 방바닥이며 이불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리자, 지형이의 얼굴은 금세 새침해졌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지형이의 말에 돌아온 민정이는 그날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너 왜 남의 집에서 난장판을 피우고는 주형이가 다 치우게 했니?” 민정이는 염치없는 말썽쟁이가 되었고, 지영이는 군말 없이 뒷수습을 하는 착한 아이가 됐다. 결국 민정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이 일르빼기가 어디론가 이사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얄미운 기억은 세월이 흘러 어느 면장실의 석유 냄새 속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민정아, 큰일 났어! 좀 도와줘!” 윗사람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직장선배 언니가 다급하게 민정이를 불렀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것은 지독한 석유 냄새였다. 난로에 기름을 채우려다 언니가 통째로 엎지른 모양이었다. 바닥은 이미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언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사정했다. "면장님 오시기 전에 좀 도와줘, 응?"

민정이는 동정심에 앞뒤 재지 않고 바닥에 엎드렸다. 걸레를 집어 들고 차가운 바닥의 기름을 정신없이 닦아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열중하다 보니, 곁에 있던 언니가 조용히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한 민정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문이 열리며 면장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냄새냐? 조심 좀 하지 그랬냐.” 면장은 혼자 걸레를 든 채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당연히 민정이의 실수로 오해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언니가 끼어들었다. “면장님, 제가 치울게요.” 면장은 혀를 차며 언니를 보았다. “역시 착해. 후배 실수 수습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 순간 민정이는 언니의 얼굴에서 장지동의 지형이를 보았다.


그 뒤로부터 민정이는 지형이 같은 아이들을 보면 이상한 피해의식이 생겼다. 한 번씩 그 가짜 가면을 확 벗겨버리고 싶었지만, 시도할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참한 사람에게 가혹하다’는 비난뿐이었다. 민정이는 평생 ‘지형이’ 같은 존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눈에는 자신을 피해자로 비치게 하는 영악한 이들이 오히려 품어주고 싶은 대상이 되지만, 실컷 맞고도 자존심 때문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은 되레 드센 가해자로 비칠 뿐이기 때문이다.

가끔 그 지독한 석유냄새가 연상될 때면 민정이가 한 번씩 곱씹는 생각들이 있다.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빨간 깃발 아래 고스란히 드러내며 ‘뒤집어쓰는’ 연화당 무당 같은 이들이, 자신의 허물조차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며’ 깨끗한 척 살아가는 이들보다 훨씬 더 순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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