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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호리 Nov 22. 2020

이제 내가 아버지

그때는 내가 아들

그제 놀다가 새벽 세시에 잠들며

주말이라 알람 설정도 안 해뒀는데,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오늘 무를 캐야 하니 10시까지 나오너라”

엄마의 전화였다.


혼은 아직도 꿈속을 헤메고

따뜻한 전기장판이 몸을 끌어당겨서

‘절대 못 가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요즘 기력이 없으신 두 분을 생각하니

도저히 거절을 못하겠어서 ‘아.. 죽을 거 같아요’하며

엄살을 부리며 승낙을 했다.


겨우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는데,

학창 시절 아버지가 새벽이건 한밤중이건

일이 있으면 어디든 아무 불평 없이 태워주시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모든 아버지들이

다 부지런한 성향이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가 그 나이가 되다 보니 그 젊은 아빠도 얼마나

몸이 힘들고 짜증이 났을까.. 나랑 똑같은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갑작스럽게 쓰러지신 후

사고가 날까 봐 차를 팔아버렸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시지만,

한 번씩 이렇게 뭔가를 옮겨야 하면 방법이 없다.

심지어 무 수확은 때를 놓쳐서도 안 되고

그 무거운 자루를 옮겨서 전철이나 버스에

싣을 수도 없고,흙가루 떨어지는 큰 자루를

택시가 받아줄 리도 만무하다.


방법이 없다.

이제는 내가 차 없는 아버지를 어디든 모셔드려야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아들 도움 없이

‘방법’이 없는 일이 많으실 텐데

평소 뭘 도와 달라는 일이 잘 없는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참고 포기하고 사시는지 예상해 볼 수 있다.


무려 20년도 전, 내가 대학 진학을 할 무렵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예비소집을 하고

약간의 먼 거리를 갈 때면,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미안함 없이

아버지의 일정이나 컨디션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심지어 불공손하게 당연하다는 듯 태워달라고 했다.


나의 요청에 아버지는 웬만해선 거절이나 불평을 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바빠서 어렵다고 하셨다가도

갑자가 헐레벌떡 오셔서는 빨리 나가자고 하셨다.


진짜 어디 상투적인 문구처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맘을 이해하게 된다.


자는 아들을 깨웠다.

“로운아 너 무 잘 캐지”


얼마 전에 아들이 학교에서 무를 캐왔는데,

무침도 해 먹고 국도 해 먹고 수다를 늘어놓던 아이에게

제대로 반응을 못해준 것 같아서

이참에 일종의 ‘반응’을 해준 것이다.


그것은.. 뭔가 나의 아버지에게

내가 이제사 감사의 반응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들아.. 너와 있어서 참 좋다”

“잘 커주라”


지금 내가 아들에게 가진 마음처럼

나의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키우셨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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