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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 응급 Jan 31. 2023

S2. 원초적 본능

1. Irritability, 비이성적 행동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이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해가 고등 교육의 척도이기도 하지만, 의무 공교육이 실시되며 '나'보다는 '우리'를 중요 시 하는 사회풍습이 만연한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타 국가보다 월등히 높은 사회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고 한다. 이런 상향화된 사회 및 교육 수준은 때로 개인의 원초적 행동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가끔 우리는 ‘점잖은 줄 알았는데 화끈하네’, 혹은 ‘샌님인 줄 알았는데 과격하네’와 같이 반전 평가를 받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란 말이다.


 법률과 윤리 규범에 순종하는 평소 한국 사회에서 본능의 고삐가 풀릴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망아지들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화재, 홍수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외압에 의해 고삐가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 스스로 고삐를 벗어던지는 순간 - 음주, 흡연, 과흥분 등 - 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나 이성적 사고가 아닌 본능에 충실할 것이 목표가 된다. 이타적, 상생과 같은 성숙한 목표가 아니라 나의 즐거움, 기쁨, 쾌락과 같은 ‘자기만족’이 최우선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응급실은 ‘긴급’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프레임 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 내 재난 공간으로, 자타의 적인 원초적 인간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장소다.




#. 4-5년이 훌쩍 지난 일인데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시간은 자정을 넘긴 즈음,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중이었다. 서울의 금요일 밤은 힘들었던 한 주를 마무리하는 날로, 젊은이부터 중장년들까지 음식점, 술집, 클럽, 노래방 등에서 한껏 유흥을 즐긴다. 주중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주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술, 담배, 친구와 같은 편안함이 더해져 이성적 사고를 덜어놓는데, 이때 긴장의 끈은 손을 벗어나게 되고, 이에 파생된 효과로 응급실에는 긴장감이 한층 고조된다.

 

 응급실은 병원마다 시스템이 다르긴 하지만, 보통 중환/경환 구역 담당자가 나뉘어 운영되다가 응급 환자가 있는 경우, 경환 구역 의료진이 중환 구역 의료진을 돕는 형식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떤 응급실이라도 응급 환자는 최우선적으로 진료를 받는다. 그날 나는 진찰실 담당으로, 경환으로 접수된 환자들의 초진을 보는 역할이었다. 금요일의 진찰실은 크고 작은 외상환자와, 다음 날이 주말이라 문을 연 병원이 적어 서둘러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가 겹치며 다른 때보다 환자 수가 많기 때문에 진료가 밀리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날도 밀려오는 환자들에 허덕이며 진료 중이었는데, 심폐소생 중인 응급환자 이송 중이라는 119의 연락이 들어왔다. 곧바로 중증 구역에 심폐소생술 자리에 각종 기계와 기구가 세팅되었고, 각 구역에서 일하고 있던 인턴들과 진료실의 나, 중환 담당의 및 각 구역 필수 인력을 제외한 간호 인력이 모두 중환구역에 모여 최고 중증도의 심정지 환자를 받을 준비를 했다. 1-2분 내외로 도착한 환자에게 바로 심폐소생술이 진행되었고, 우리 모두 순조롭게 소생에 집중하고 있었던 때였다. 대뜸 옆에서 젊은 남성이 큰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 먼저 진료 봐줘요?”

“이분은 심정지 환자고 여기서 제일 응급한 환자입니다. 앞에서 응급 환자 있을 경우 진료 지연될 수 있음 설명 들으셨을 텐데요.”

“그럼 저희도 나갔다가 119 타고 오면 먼저 봐주시나요?”


 알고 보니 진료받기 직전에 119 연락이 와 내가 진료실에서 튀어나가는 바람에 대기하게 된 환자의 보호자였다. 보통 심폐소생술은 아무리 짧아도 30분 정도는 걸리기 때문에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밖에서 곁눈질해 보니 의료진이 다 거기에 몰려있더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아 보여, 한 명쯤은 대기실 가득 차도록 기다리는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지 않냐고 소리친 것이었다 (나름 논리적이긴 했다). 나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손을 바꿔 내려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중이었으며, 갑작스러운 운동에 의해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의료진 역시 이성적이지 않게 만든다.


“아니요, 차에서 내려서 접수하고 처음부터 다시 기다리라고 할 건데요.”


 남자는 뭐 저딴 의사가 다 있냐고 씩씩대더니, 그래도 별다른 조치가 없자 대기실로 돌아갔다. 욱한 마음에 내지른 나 역시 ‘재수 옴 붙었네’하고 구시렁거리며 눈앞의 환자에 집중했고, 어찌어찌 심폐소생술을 마치고 드디어 진찰실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대면하게 되었다. 감정이 상했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나는 한낮 피고용인에 불과했으니).


“어디가 제일 불편해서 오셨나요?”

“무릎이 다쳐서요.”

“넘어지셨어요? 상처 좀 보겠습니다.”

“네.”


들여다본 무릎의 중간 즈음에 멍과 함께 찰과상이 관찰되었다. 눌러보니 앓는 소리를 내긴 하지만, 걷는데 문제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눈가에서 자꾸 반짝거리는 게 영 거슬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본의 아니게 본 환자의 팔목에는 근처 클럽 도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상처에서 멀찍이 떨어져 거시적인 시야로 보니, 환자와 보호자 모두 음주의 기운이 폴폴 풍겨나고 있었다. 기운이 쭈욱 빠진다. 주취자들이었구나. 역시 금요일이다. 다치게 된 경위를 물어보니 넘어지면서 무릎을 바닥에 찧었단다. 일단 찰과상 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말하려고 하는데, 덤덤한 환자보다 보호자로 온 남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자기야, 엑스레이나 시티 안 찍어도 돼?”

“웅, 괜찮아. 이거 드레싱만 해달라 그러자.”

“그래도 부러졌으면 어떻게 해.”

“나 실비 있는데 여긴 안돼. 내일 다른 데서 찍자.”


의사는 난데, 진료 플랜은 알아서 짠 듯했다. 소곤거려 안 들리는 줄 알았겠지만, 진료실이 의외로 공명이 되어 잘 들린다.


“안 부러져 보이지만, 혹시 몰라 엑스레이는 찍으려고 했는데, 드레싱만 원하시면 처치실에서 대기하세요. 나중에 부어오르거나 아프면 그때는 꼭 찍으세요.”


 어디 한번 얼마나 다쳤는지 보자고 마음먹은 것치고 매우 싱겁게 진료가 끝났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보호자는 어느 포인트에서 만족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는 소리쳐서 미안했다며 악수까지 청한다. 주취자여서 해탈한 것도 있고, 저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니 나도 마음이 풀려서, 응급실 생태가 원래 응급 환자 진료 우선이라 다음부터는 이해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외압에서 벗어난 우리는 빠르게 이성적인 생물인 척 행동한다. 소란이 지나간 응급실은 한동안 조용했다.



 

  이렇게 응급실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맞닥뜨린다. 고통은 쉽게 사람의 이성을 무너뜨리는 외부 자극이며, 원초적 상태의 사람에게는 눈앞의 제 상처가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순위가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대화를 통해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오도록 회유할 수 있다.

 주취 환자가 특히 까다로운 이유는, 우리 대부분은 고등 교육 및 사회화 훈련을 통해 논리 단계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막무가내로 진료를 요구하기보다, ‘내 상처가 저 사람보다 경한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먼저 왔으니까 사회 규범에 내가 우선 진료를 받아야 한다’라는 식의 단계별 사고를 거쳐 주장을 내세운다. 이는 지극히 비논리적이지만 (비슷한 예로 ‘내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지만, 아프지 않은 것 같으니 약만 처방받을래요’ - ‘아니 술 마셨으니 안 아프죠 지금 뼈가 보이는데!’가 있다), 평소에 논리에 의거하여 주장하던 사회 관습이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가 과연 이성적인가에 대한 기본 고찰 단계를 건너뛰어 버린다. 알코올의 힘에 의해 원초적인 본능이 목표가 된 상태에서는 이 논리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응급실에서는 이타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주취자와 응급실 사이에서 충돌점이 발생한다. 응급환자를 먼저 진료해야 한다는 응급실의 목표는 다른 환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하는데, 양보는 주취자의 목표 반대편에 있으므로 대부분 주취자의 주장은 묵살당하기 마련이다. 단계별 사고에도 불구하고 주장이 거부된 주취자들은 ‘나는 이성적으로 행동했는데 무시당했어. 그럼 나는 그만 이성적일래. 이제 화를 낼 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정당한 분노를 표출한다 (때로 만취한 사람이 진료하기 더 진료하기 수월한데, 그들은 사고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료진, 특히 응급실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항상 인지하라고 교육받지만, 인지와 별개로 의료진 역시 사람이기에 급변하는 주위 환경과 자극에 노출되었을 때 이성적 판단이 무너지며 종종 본성을 드러낸다 (웃긴 것은 지금까지 지적이라고 평가받던 사람일수록 더 크게 터뜨리는 경향이 있는데, 자타의 적인 외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고 생각하며 억눌러 왔던 본능을 표출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위의 일화가 아니더라도 응급실은 비이상적 행동이 병원 어느 곳보다도 더 자주 반복되는 곳이다. 응급실이라는 곳에 발가락 한 번이라도 디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적 사고가 짓눌릴 정도로 본능이 팽배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급실의 ‘응급’이란 단어 뒤에 숨어 이곳을 지적 사회 내 합리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사고 예외 가능 구역’으로 정의하고 내버려 둔다.

 하지만 응급실도 충분히 이성적일 수 있는 곳이며 오히려 더 이성적인 사고에 따라 진료가 진행되어야 할 진료 공간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우리는 의술뿐만 아니라 감정의 제어, 외부 압력에도 이성적 사고를 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술을 먹지 않아도 술 취한 사람만큼만 사고하려 하지 말자. 상대방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 자신의 비이성적 사고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그러다 수련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외부 자극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는데, 진료가 방정식이라면 ‘외력이라 함은 변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식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라고 생각하고 진료할 수 있다.

 물론 성숙한 의료진이 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며 그 과정에서 냉혈한, 고집불통과 같이 감정적 공감대 형성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종종 성숙한 의료진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본능을 조율하는 능력이야 말로 응급의학과가 가져야 할 소양이지 않을까.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https://mbdrive.gettyimage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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