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Shortsightedness, 근시안의 법칙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꾸며진 나를 뽐내는데 할애한다. 수컷 공작이 화려한 털을 펼치듯 이것은 본능이다. 나 자신이, 상대방이, 그리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재단된 표현형의 나로서 의식하는 게 익숙하다. 꾸밈이 필요 없는 개인의 시공간에서도 꾸밈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수면과 같은 무의식이 신체를 지배할 때나 되어서야 본모습을 드러낸다.
의식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본능은 가려져있고,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본능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때는 추악한 나마저도 수용하겠다는 믿음이 굳건한 타자와 약속한 가운데 서로의 가면을 내려놓는 경우가(대부분의 이런 관계는 단순친분 사이가 아니기에 많은 날 것의 모습을 함께 교류한다) 대부분이지만, 종종 외부의 압박에 못 이겨 가면을 멀리 벗어던지는 경우도 있다.
가면은 나를 숨길수록 의미 있다.
의도와 상관없이 가면을 쓰고 벗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나에 대한 타자의 부정적 시선이 따라온다. 따라서 우리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어도 그러지 않는 인내심, 충동과 자극을 이겨낼 역치라는 걸 배운다. 본능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의식의 주인으로 지배자의 장점이 훨씬 방대하므로 우리는 자극에 버티도록 교육을 받는다. 역치가 있기에 웬만한 지속적인 자극 또는 순간의 자극에 우리는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한다. 하지만 자극이 너무 세거나, 혹은 작은 자극일지라도 축적되어, 혹은 의식 상태가 좋지 않아 평소보다 역치가 낮아 형성되어 순간의 역치를 넘기는 자극을 수용하면, 얼굴에 단단히 붙어있던 가면을 벗어던지는 반사적 행동을 보인다.
이는 단순히 본능이 신경 단위의 매우 빠르고 조절이 불가능한 반사적 경로로 새어 나갔기보다는, 대부분의 일에 선행된 본능적 사고와 행동을 인내와 역치라는 도구를 통해 매우 정교하게 조절하고 있었음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본능의 나를 드러내는 것이 항상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누구는 본능의 모습이 있기에 인간적일 수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번 무너진 역치는 새로운 역치의 전위가 형성될 때까지 언제나 일정 기간의 휴지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이성보다 본능적 사고에 지배를 받으며, 복잡하고 정교한 조절이 아닌 단기적 사고로 일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위협이 된다. 관성적으로 평소와 같은, 혹은 더 과한 노력을 들여 일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 사고로 인한 목표 설정은 근시안적인 경향을 띤다. 이는 나의 노력이 ‘단순히’, ‘미봉책’이라는 언어로 폄하되어 부정적인 자극으로 다가온다. 평소라면 걱정할 정도의 자극이 아니겠지만, 인내라는 방패막이 없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방어기제와 함께 단기적 사고와 행동을 반복한다.
이런 경험에서 우리는 문화권을 막론하고 ‘숲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멀리 내다보아라.’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학병원의 장점은 ‘24시간 의료진 상시 대기’라는 점이다. 단점 역시 ‘24시간 온콜(on call, 항상 전화를 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의사도 당직 때 전화를 받는 게 달갑지 않다. 남들은 자고 있을 때 선잠을 자거나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도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누가 밤에 일한 만큼 당직 수당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돈 안 받고 당직을 서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당직은 대학병원에서 필수이지만 의료진에게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은 근무의 형태이다.
응급의학과의 당직은 약간 다르긴 하다. 당직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당직 후에 쉼 없이 시작되는 일과 때문인데, 응급의학과는 야간 근무 후 다음 근무까지 최소 근무한 시간만큼 휴식을 취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심신 회복을 할 수 있는 보장된 여유 덕분에 상대적으로 당직 근무 시 역치가 타과보다 높으며, 낮잠을 잔 뒤 상큼한 상태에서 야간 근무를 시작하는 날은 상냥하기까지 하다. 이런 근무 형태의 차이에서 옥신각신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타과 의료진들은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쉴 건 다 쉬는데 우리와 동일한 당직비를 받는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반면, 응급의학과 의료진들은 ’ 근무 스케줄의 반이 야간 근무인 것은 휴게가 없으면 안 될 스트레스 유발인자이다. 당직 후 휴게라는 사실 하나로 응급의학과가 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받아친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밤이 깊어짐과 동시에 피곤은 쌓이며, 원치 않는 연당(연속 당직) 등 여러 복합요소가 겹쳐지면 과의 유감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고, 이때 받은 자극은 충분히 가면을 벗겨낸다.
“심장내과 선생님, NSTEMI (Non-STEMI, 심근경색 종류 중 하나) 의심환자입니다. 지금 통증은 없고, vital stable(신체 징후가 안정되었음) 한 상태입니다. f/u enzyme(심장효소수치를 일정 시간 뒤 재검하여 비교하는 것)은 지금 접수 중입니다. CAG 여부 및 심장내과 협진 부탁드립니다. “
“…네...”
자고 있는 당직의를 깨우는 건 언제나 안쓰럽다. 친분이 있으면 더 미안하고, 견웅지간이어도 마음이 쓰인다. 때문에 주취자들도 접수가 되지 않는 깊은 새벽에는 어지간히 급한 (목숨이 넘어가거나 시간이 중요한) 협진이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응급실에서 처리할 수 있는 치료를 다 진행한 뒤 협진을 진행한다, 30분이라도 더 자라고. 보통 밤의 응급실의 시스템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만 그게 안 되는 날, 소위 ‘환자를 타는 날(환자가 예상보다 많은 날)’이 발생하면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약속을 하고 아픈 게 아니므로, 과부하 된 일로 인한 원망의 대상은 돌고 돌아 결국 시스템, 즉 당직 체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굴리는 응급의학과 의료진에게도 투영되어, 우리와 연락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해당 과의 당직의의 자극은 점점 쌓인다. 우리는 그것을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으로 알아채곤 했다.
그날도 환자를 타는 날이었다. 이미 자정 즈음에 심근 경색 의심 환자가 접수되어 푸닥거리를 하며 마지막으로 중환자실로 이송한 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비슷한 환자가 또 접수되었다. 시간을 가늠해 보니 아마 심장내과 당직의는 이제 막 중환자실 환자에 대한 각종 검사 및 투약 오더(order)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 환자가 왔는 걸. 최대한 응급의학과 선에서 처리할 건 처리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심장내과가 협진을 위하여 당직폰으로 연락했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전화를 끊고 몇 마디 욕지거리를 지껄인 후 5분 정도 침대에 누워서 신세한탄을 하다가 내려올 모습이 눈에 선했다. 5분 정도의 여유를 벌기 위해 환자와 보호자에게 곧 심장내과 당직의가 내려올 거라 설명을 한 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5분이 뭐야, 10분, 15분이 지나도 심장내과 당직의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다시 자는 가 싶어 전화를 걸었다. 너무 고된 날에는 기절해서 다시 자는 경우는 다시 깨워주기도 했다.
“아, 선생님… 곧 내려갈게요.”
역시나 너무 힘들어서 자고 있었나 보다. 아까보다 더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꽤 흘러서 심장내과 선생님은 언제 내려오냐고 데스크까지 나와 불만을 표현하는 보호자에게 다른 급한 환자를 보시느라 늦는 것 같다고 적당히 둘러대었다. 이 정도 불만은 심장내과 의사가 내려오는 순간 사그라들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내려온다던 당직의는 두 번째 전화에도 30분째 감감무소식이다. 다시 자나 싶어 다른 당직의 에게 부탁까지 해 자고 있으면 깨워달라고 했지만, 자리에 없다는 답변뿐이었고, 몇 차례 전화를 해도 신호음이 뚝 끊긴다. 이것은 명백히 콜을 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는 아마 응급실에 있는 환자를 대면 파악하지 않아도, 환자에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 뒤에나 나올 수 있다.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는 것인데 역시나 협진지가 이제 막 작성 중으로 예비 저장되어 있었다. 내용에는 “f/u enzyme이 이전 수치보다 유의미한 증가를 보이지 않아 응급 관상동맥 조영술은 필요하지 않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
오호라, 환자를 보지도 않고 협진지를 쓴다 이거지.
물론 오전에 전문의에게 연락을 한 뒤 협진을 완료할 생각이었겠지만, 협진 내용을 환자를 대면하지 않은 채 작성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급의학과와의 연락 수단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는 것은 응급의학과 특유의, 미친개같이 물고 늘어진다고까지 하는 끈기를 불어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30분마다 당직폰으로 연락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전공의를 통해 심장내과 선생님 전화받도록 압박 넣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가 되기 전까진 틈날 때마다 계속 전화를 울려대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결국 통화가 연결되었고, 화난 목소리가 대뜸 넘어온다.
“아, 피검사 결과 봤고요! 아침에 교수님 노티(notify) 한다고요! “
“선생님, 다른 환자 온 거면 어떻게 하시려고 전화를 안 받으세요? “
“…“
“그리고 환자도 안 보고 진료 방향 결정하시면 안 되죠. 검사 결과만 볼 거면 제가 왜 심장내과에게 연락해요? 일단 연락은 협진 환자 건 때문이고요, 그 환자 피검사 수치는 괜찮지만 환자 다시 통증 호소하기 시작해서 2차 재검 들어갔어요. 결과보고 조영술을 가던, 약을 쓰던, 필요하면 중환자실도 어레인지(arrange, 자리 예약)해야 하는데 그걸 환자 안 보고 가능하세요?”
“…네!”
전화가 끊겼다. 이 정도면 싸우자는 얘기다. 열불이 들끓어 올랐지만, 나까지 이성을 놓으면 모든 게 산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미 화가 날대로 난 보호자를 달래면서 화를 삭였다. 이런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맞부딪히는 방법을 택하면 경험 상 항상 결말이 좋지 않았고, 다음 다다음 협진 시에도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하므로, 살살 달래는 게 최선이다. 일단 나 먼저 달래기 위하여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끓어오른 화를 억누르며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아마 몸도 힘든데 일은 자꾸 쌓이고, 그런데 욕도 먹으니 기분이 많이 상해서 홧김에 전화를 던졌겠지, 저쪽도 그걸 후회하고 있겠지,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그런 생각들을 곱씹고 있으니 벌써 새벽 4시가 되었다. 당직의는 내가 전화하지 않아도 한 시간 정도 뒤에는 일어나서 일과 준비를 해야 했다. 때마침 나온 2차 재검 결과를 보니 다행히 응급 시술의 적용증은 아니지만, 흉통이 간헐적 있어 중환자실 입원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대충 입원에 필요한 추가 검사들이나 치료 약물을 준비해 두고 4시 30분 즈음 조심스럽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도 받는 걸 보니, 아마 깨어있었던 듯했다.
”…네… 심장내과입니다. “
“네, 선생님. 결과 다 나왔는데 시술 적응증은 아니지만 흉통이 있어서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
“…네. “
“그리고 혹시, 바쁜데 미안한데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 좀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저희가 여러 번 했는데 꼬옥 심장내과 선생님을 뵙고 상담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하… 갈게요.”
그래도 환자를 저버리진 않는 걸 보니, 별게 다 고맙다. 환자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무시했다면 이 병원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정말 한 치 앞을 못 보는 눈먼 장님이라는 건데, 그 정도 근시안적 시야는 아니었나 보다. 전화가 끊긴 뒤 10분 정도 뒤, 덜 마른 머리의 심장내과 당직의가 보호자와 환자에게 그간 검사 결과와 앞으로의 치료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중환자실을 어레인지 및 남은 오더를 정리한 뒤 사라졌다. 그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예와 같이 작은 목례도 함께 나눴다.
안쓰럽긴 하지만 심장내과 당직의가 만약 첫 번째 연락에 내려와 줬더라면, 어떻게 할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들은 게 있더라면, 응급의학과의 자극버튼이 눌리지 않았을 것이고, 당직의도 불필요했던 수많은 콜과 인턴, 다른 당직의가 그를 깨우러 오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최선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직무에 대해 성의만 보였다면, 어련히 알아서 연락을 센스 있게 했을 텐데, 본능에 지배되어 가면을 벗어던지고 늦장을 부린 결과, 과한 피로를 덤으로 얻어갔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좁은 시간의 틀 안에서 무한 반복을 경험하며 산다. 의사 역시 심한 경우 2분, 3분, 5분 단위로 환자를 체크해야 하는 때도 있고, 일이 많은 시기에는 할당된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바늘로 가르듯 세분화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정교하게 제작한 계획표에는 마음이 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극은 늘어나는데, 역치는 정체되어 있다. 계획대로만 일이 흘러가면 좋으련만, 시간의 흐름에 틀어지거나 덧대어진 계획은 미봉책의 피드백으로 수정하기 급급하다. 이는 질적 저하가 동반된 계획 수정을 초래하며, 따라오는 결과도 썩 좋지 않다. 노력에 비해 적은 보상은 또 다른 자극으로 다가와 부정의 쳇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쳇바퀴는 양적, 질적 모두의 자극을 증폭시키고 결국 인간은 인내를 잃고 모든 걸 놓아버리려는 유혹에 지고 만다.
여유롭지 못한, 근시안적 시야는 인간을 시간에 잡혀 살고, 다스릴 줄 모르게 한다. 심적 여유는 시간 활용을 효율적으로 할 시간적 여유를 이끌어내어 안정적인 나를 유지시킨다. 미숫가루를 섞기 위해서 약간의 공간이 필요하듯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숲을 보기 위해 노력하자.
눈앞에서 부딪히는 걸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후를 두려워해야 한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 “에드몽 메트르의 초상“, 르누아르, 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