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Defensive, 방어적 태도의 법칙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인간이라면 경쟁에서 벗어날 수 어렵다는 뜻이 함포 되어 있다.
경쟁은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가 가진 본질이다. 단세포종인 플랑크톤부터 고등생물인 포유류까지, 진화 단계 및 사회 능력의 완숙도에 따라 순수한 경쟁에서부터 교활한 경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는 필연적으로 공생과 함께 경쟁 - 그 대상이 다른 단일 개체이거나, 집단, 혹은 종으로 확장되기도 하는-이라는 사회본능적 행동을 표현한다. 지구상 현존하는 최고 고등 지능 생명체인 인간에게 경쟁은 사회를 떠난 은둔자가 아닌 이상, 삶을 영유할 때 필연적인 본능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경쟁을 자가발전의 용도로 사용하며 삶의 목표와 원동력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과도한 사회화와 이로 인한 무분별하게 형성된 관계,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경쟁 구도에 피로함과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생겼다. 일부는 완숙한 인간 개체를 지향점으로 삼고, 타인과 집단에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는데, 타인과 경쟁적 교류를 지양하는 방어적 태도는 독립 욕구 중 하나이다.
응급의료센터는 응급의학과 단일 과로 운영될 수 없다.
환자의 초기 응급처치까지는 응급의학과 고유의 진료 범위이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치료 및 검사에는 타과와의 교류가 필연적이다. 좋게 말하면 ‘다학제 교류가 활발하다’ 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다학제 간 이견 발생으로 인한 심신적 다툼’이 빈번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다툼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의학적 우월성이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질 좋은 경쟁만 하지 않는다. 꽤 많은 순간, 과격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질 낮은 방법이 우위 선점에 더 효율적이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그 예로 사회위치적 이점을 이용한 내려찍기, 인해전술, 과격한 언어 사용 등 각종 방법이 존재한다.
위에 나열한 예시들을 수년간 돌려 사용했던 지난날의 나는, 전공의 생활이 무르익을수록 허함을 느꼈다. 다툼에서 이길수록 남는 것은 허무함과 찝찝한 기분, 그리고 타과의 좋지 못한 평가가 다였다. 이는 나의 정신을 갉아먹어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시비 걸지 않기, 싸우지 않기’라는 방법이었다. 절대로 먼저 싸움을 걸지도, 싸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이는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선생님, A 환자 CT(컴퓨터 단층 촬영, 신체 내부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촬영 끝났어요!”
자꾸 오른쪽 윗배가 아프다고 하던 환자였다. 세 달 정도 전부터 달에 한 번 정도 아프던 게, 최근 들어 주에 한 번으로 그 간격이 줄어들었단다. 아플 때는 식은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아픈데,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말끔하게 없어져서 굳이 병원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길어져 허리를 펴지도 못한 상태로 응급실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면담 및 신체 진찰을 하고 나니, 담낭염(쓸개라고도 불리는 소화 효소를 담고 있는 기관으로, 이 부분에 염증이 생기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데, 담석(쓸개돌)을 가지고 있는 경우 염증이 잘 생긴다)이 의심되어 혈액검사와 함께 영상 검사를 진행했다.
CT를 찍고 오자 아니나 다를까, 담낭이 염증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문제는 염증을 일으킨 돌의 위치였다. 담낭의 입구 쪽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져 있는 게 곧 담관(쓸개와 장을 잇는 관으로, 이곳으로 담석이 내려가면 담관염이 생기는데, 이때는 수술적 치료가 아니라 내시경적 치료를 우선으로 한다)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혈액 검사 결과도 담낭염보다는 담관염에 가까운 소견을 보였다. 이런 경우 치료 방법에 따라 주치과가 달라지는데, 하필이면 수술적 치료와 비수술적 치료의 양대산맥인 외과와 내과의 부딪힘이 예견되었다. 일단 영상 검사 판독 상 담낭염이었기 때문에 수술을 위하여 외과에 응급 협진을 요청했다.
“응급의학과 선생님, 이거 수술 못하는데요?!”
협진지를 작성한 지 얼마 안 있어 외과 당직의가 씩씩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충분히 외과 측에서 반발할 수 있는 소견이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혈액검사가 좀 애매하긴 한데, 아마 담석이 담낭 입구 쪽에 걸려있다 빠졌다 하는 것 같아요. 확실하지 않으니 초음파로 팔로업(follow up) 하고 수술 여부 결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걸 왜 응급의학과가 판단하죠? 수술여부는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내과도 협진 걸어주세요. “
오늘따라 외과 당직의가 답지 않게 화가 많이 난 걸 보니, 복잡한 협진이 몇 개 있나 보다. 말투가 살짝 거슬렸지만, 부딪히지 말기로 다짐했다.
“외과에서는 담관염으로 보신다는 의미죠? 수술적 치료가 아니라 내시경적 치료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네.”
“일단 내과랑 이야기해 볼게요. “
“네.”
외과 전공의가 자신의 소기목적을 달성했는지 발을 돌려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빠르게 멀어져 간다. 말투뿐만이 아니라 의견 전달에 있는 태도에 있어 다시 한번 신경을 긁었지만 싸워서 남는 게 없다. 환자 처치만 늦어질 뿐이다. 이럴 때는 굳이 내가 아니라 내과 당직의와 직접 담판 짓게 하는 게 빠르고 안전하며 나의 평화 및 감정 균일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내과 선생님, 외과에서 같이 협진 걸어달라고 요청이 왔네요. 담낭염이라고 영상 판독이 나왔지만, 혈액 검사가 담관염에 가까워서요.”
“그냥 외과에 입원해서 초음파 보고 수술 못하는 경우, 저희(내과)에게 공식 협진 걸면 되는 거 아녜요? 환자 컨디션도 좋던데. “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외과 선생님은 다르게 생각하시나 봐요.”
내과 당직의 역시 예민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응급 협진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환자를 파악하고 있었던 걸 보니, 협진에서 지지(진다는 표현이 매우 적나라하지만)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차라리 잘됐다.
두 과 모두 주장이 강력하므로 부딪히면 빠른 결정이 날 것이 틀림없다. 이럴 때 내가 굳이 사이에 껴서 말을 전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될 일도 안된다.
“내과 선생님, 외과 선생님 지금 B구역에 계시던데, 직접 말씀 나눠보시겠어요? 번호가…“
“저 아까 봤어요. 번호 안 주셔도 돼요. 그냥 가서 말하고 올게요. “
“네, 다녀오세요~”
예상대로였다 둘이서 투닥투닥 이야기를 나누더니 외과에서 입원해서 보기로 했단다. 사실 나는 그 둘의 이야기를 뒤에서 슬쩍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협진 의뢰지가 마감되기 전에 외과로 입원준비를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빠른 협진이 마무리되었다.
관계를 맺고 유지함에 있어서, 원하지 않는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관계에서 경쟁에 적극적이며 포용에 소극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관계를 마음대로 파기할 수 상황이면 최대한 경쟁을 피하는 방어를 우선 사용해 보자. 상대방의 날 선 의견에 대항하여 방패와 창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틀어 피하는 것도 좋은 방어 수단이자 동시에 좋은 공격 수단이다. 타인이 걸어온 경쟁에 항상 똑같이 경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경쟁을 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체력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쉽게 파괴된다. 반대로 감정에 휩싸여 경쟁의 노예가 되면, 경쟁의 궁극적 목표가 고작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된다.
방어적 태도란 나를 감정적 경쟁에서 보호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망의 자세로, 나아가 포용의 자세를 취하며 멀리 내다보는 습관을 기르자. 이것이 반복되면, 상대방 역시 대립을 통한 감정적 경쟁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우아한 경쟁을 하게 된다. 나의 의견을 고수하면서 대화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대화를 이끌게 하되, 의도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조타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응급의학과의 역할이란 (여러 과를) 잘 조율하여 최상의 의료를 베푸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나의 입장이 달라져야 함을 의미하므로, 유연한 생각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게 함과 동시에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의료 백업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일임을 뜻한다. 이때 경쟁과 결투보다는 방어라는 본능이 적합할 수 있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 “The defenstration of Prague, Maz, 1618 “, 작가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