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Repression, 억압의 법칙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김국환, “타타타” 중,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이해하고, 그것으로 타인과 교류한다. 그리고 교류를 위해 개인은 본인의 부정적인 면을 사회적 괴리감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한다. 불안, 분노, 욕망 등 언제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용인이 어려운 성향들을 긍정의 가면 뒤로 숨기는 절제력으로 타인에게 긍정적이 게만 비치길 바란다. 하지만 절제력은 어두운 면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아니다. 절제의 역치에 다다라 절제력을 잃으면 폭력 등의 과잉 행동 등의 억제된 욕구가 분출된다.
인간은 어두운 면을 ‘본능적 걸림돌’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연마하기 위한 전구체의 역할로 포용해야 한다.
A와 B, 두 의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교수가 되었다.
A 의사는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9시 출근에 8시 57분에 도착했고, 18시 퇴근에 17시 55분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매사를 미리 준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늦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A가 답답하다 ‘라고 불평했지만, A는 ’ 늦은 것은 아니잖아요?‘ 라며 속 편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의술이 특출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시에 응급 수술이 생기거나, 진료 중 예기치 못한 일에도 항상 침학하고 덤덤했다.
“그럴 수 있지 뭐. “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봅시다.”
“어제는 응급 수술 더 많았잖아요, 오늘은 그것보단 적겠죠.”
A 의사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그는 ‘너, T 야?‘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 같은 장난스러운 놀림 역시 웃어넘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A와 일하면 중간 이상은 간다는 믿음이 생겼다. 근무 때 종종 일어나는 응급 상황에서 적어도 A가 옆에 있다면 빠르게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A는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B 의사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는 A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깔끔한 사람이었다. 휴대전화 배경화면이 한 달 치 스케줄표였으며, 공과 사가 구분된 일정 관리 앱의 알림이 하루종일 울렸다. 그는 주어진 일을 100이 아니라 200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예정된 일을 누구보다 꼼꼼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B와 일하면 편하다’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료들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제 일이 아닌데요. “
“결과가 확실해지면 연락 주세요. “
B가 당직일 때면 항상 일이 생겼다. 자잘한 다툼이나 말씨름들이 끊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B에게 응급 상황이란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는 신중을 가한다는 이유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일을 피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스트레스가 쌓인 B는 후배나 직장 동료에게 교묘하게 화풀이를 했다.
“10분 줄 테니까 xx 환자 보고 준비해 주세요. “
“환경이 너무 더러워 집중이 안되네요, 청소 좀 해야겠네요.”
“선생님, 이거 아직도 안 됐어요? (오더 내려온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요) 네 10분밖에 안됬다고요? 그럴 리 없을걸요?”
덕분에 평소에 ‘젠틀’ 그 자체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B가 당직을 선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동료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자잘한 다툼과 화풀이가 반복되자, B 의사는 ‘일은 잘하는데 같이 하고 싶진 않은 의사’라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같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줄어들면서 일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 일도 그저 그런 카탈스러운 의사‘가 되고 말았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면, 의료진이던 환자던 자제력의 역치에 다다른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은 여러 방법으로 억압되었던 본능을 분출하는데, 큰 분노를 여러 번의 작은 분노로 표출하는 유형, 한숨 쉬며 속으로 삭이는 유형, 가학적으로 일을 하는 유형 등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은 바로 큰 분노를 작은 분노로 표출하는 유형이다. 화는 크기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위협 등 불편함을 전달하며, 때로 분출자는 타인에 반응을 보며 자신의 스트레스가 해소됨을 느낀다. 또한 분노의 크기가 작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행여 분노의 대상이 대항할 경우 ‘미안합니다, 제가 과했네요 ‘, 보다는 ’ 별 것도 아닌데 과민반응하시네요’하고 분노를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범위라고 정당화시키려고도 한다.
다만, 타인과의 관계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어떤 사람의 가면에 가려졌던 어두운 면이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그 부정적 면이 주요하게 타인에게 인식된다. 100번의 성공적 수술보다 1명의 실수가 그를 평가하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노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분노를 표출했다는 사실이 그를 평가하는 지표가 되며, 아무리 잘 단련된 페르소나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특히 의료진의 경우, 그동안 자신이 쌓아둔 이미지로 자신의 실수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것이라고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는 자신이 바라는 타인의 평가를 맹신하고, 자신의 부정적 본능을 의료와 결합하여 (진료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무마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이는 굉장히 비겁하고 근시안적인 해결책으로, 차라리 사람 본능의 불안정적 요소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정적 성향은 존재한다. 누구나 화를 낼 수 있고, 반복되는 스트레스에 짜증이 난다. 이런 것들은 본능이다.
우리는 본능의 에너지를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무해한 방법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해학적으로 분출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데 원동력으로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상대의 페르소나에 매력을 느낄 순 있지만, 결국 그 사람의 본능적 성향에 이끌리게 된다. 개인의 페르소나 뒤의 본능에 공감대를 형성할 때 진정한 교류를 느낀다.
서로가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당신이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면, 같이 되받아칠 것이 아니라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자. 타인의 절제력 잃은 모습에도 비판과 비난이 아닌 공감을 보여주고, 그것을 간접경험 삼아보자.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