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죽음 부정의 법칙
어쩌면, 사람들은 인생 끝에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는지도 모른다.
죽음이 주술적, 종교적 의미로 금기 시 되었던 이전과 달리 죽음은 오히려 인생의 일부분으로 정의되어 존중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각종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던 옛날과 달리 죽음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전보다 많이 줄은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삶에서 실제 죽음을 접하는 나이가 굉장히 높아졌고,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배운다. 매체에서 접하는 죽음은 부자연스럽게 예쁘고 아름답거나, 적나라한 죽음은 최대한 가리거나 암시하는 기법으로 묘사된다. 다른 사회적 본능과 이성이 모두 개발되고 나서야 실제 죽음을 접했을 때 실제와 상상의 괴리감에, 우리는 죽음을 낯설고 두렵게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필연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가다듬을 수 있다. 이 훈련은 인생에서 마주치는 고난과 슬픔, 위기 등을 수월하게 감당하도록 하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지침이 된다. 죽음을 인식한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더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응급실은 하루에도 수 십, 수백 명의 사람이 오간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병원밖 사람들은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라고 하면, ‘급사’이 먼저 떠올릴 것이다. 빗길에서 달리던 오토바이 운전자 사고, 갑작스러운 대동맥 파열,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 마비 등이 이 경우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환자를 포함한 주변인 모두가 굉장히 고통스럽고 당황한다.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우리는 그분들을 삼도천에서 다시 이승으로 모셔오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삶의 임종 단계에 다다른 분들이 응급실을 찾는 경우도 왕왕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암 투병을 하신 분들, 여러 성인병 및 그 합병증으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머무르셨던 분들, 때로는 노쇠로 집에 머무르다 주변을 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신 분들이 응급실을 방문한다. 그분들 중에 의사소통이 되는 분들보다 안 되는 분들이 더 많으며, 대부분은 일인실 등으로 입원하여 가족들 곁에서 임종을 맞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다. 따라서 위의 경우들과는 다르게 매우 조용하고 엄숙하게 흘러간다.
위의 두 가지 죽음은 현저히 다르지만, 모두 슬픔이 전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이 온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다시 보지 못할 환자의 모습에 슬퍼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접했던 나 역시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안타까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도중, 접하게 된 한 죽음은 나의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응급실을 자주 방문하는 어느 난소암 환자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우연히 발견한 난소의 암덩어리는 수술과 항암, 방사선 등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불과 2-3년 만에 온몸으로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이제는 통증 완화밖에 할 수 있는 치료가 없었다. 병원 입원을 굉장히 싫어했던 분이라, 아플 때마다 응급실에 방문하여 하루이틀 정도 치료하고 다시 자택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이전처럼 의료진들과 눈인사를 할 수 있었던 상태조차 되지 못하여 눈만 꼭 감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하혈과 복수로 인한 숨참을 확인한 주치의 교수님이 예외적으로 (회진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접 응급실을 방문하여, 환자와 보호자에게 임종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전하며 마지막 회진을 마쳤다. 주변 병상의 다른 환자들도 주변에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매우 조용하고 숙연한 자세를 취해주셨다. 우리는 환자의 마지막 길, 조금이라도 편하도록 진통제를 넉넉하게 드리기 위하여 환자의 병상 가까이에 갔는데, 놀랍게도 환자는 웃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삶의 마지막이자 자신의 죽음을 은연중에 반기는 눈치였다. 환자는 어서 진통제를 수액에 연결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고, 그 불편한 침대에서 잠이 든 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영면하였다. 사망선고를 하고 나서도 계속 그분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만족스러운 죽음이었던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노쇠, 자살, 병사, 사고사 등 죽음에도 다양함이 존재한다.
이 중에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죽음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그 또한 예측불가한 경우가 많다. 다가올 것 같지 않은 먼 미래의 안락한 죽음보다 다소 급하게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의 순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본능을 느낀다. 심근경색으로 본인의 죽음을 예견했던 어느 50대 남성은 부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사랑한다고 소리친 것이 마지막이었고, 요양병원에서 모셔진 80대 여성분은 그렇게 냉커피믹스를 애타게 찾아 결국 한 모금 마셨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진다.
좋은 죽음, 나쁜 죽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단 한 번뿐인 경험이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나 도달한 마지막 순간의 궁극적 고통일 것이다. 죽음을 알고 익숙해지기 위해선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야 한다. 죽는 법을 배워가는 것은 죽음의 노예, 삶의 노예에서 벗어나 삶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나는 본능으로 점철된 것보다는 이성적인 죽음을 맞고 싶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그림 출처 :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메트로폴리탄, 1787]
이상으로, 원초적 본능 시리즈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