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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Dec 02. 2023

미정 2

78억 분의 1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려다 집으로 돌아와서 때마침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낮잠을 청했다. 이 사이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오전에 스타벅스에 들리기 전에 떠오른 글의 리드가 있었는데, 그것을 까먹는 바람에 이러쿵저러쿵 궁시렁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갑자기?).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나의 감성이 무뎌진 건 호주 멜버른을 다녀온 뒤, 이제 한국의 어느 낯선 땅을 내디뎌도 그 밥풀에 그 나물이라는 것을 느껴진 시나브로 이후였던 거 같다. 감성이 풍부했던 시절은 어느 장애인 재활원에 가서 의무 봉사활동을 하고 집에 되돌아오더라도, 그 병동에서 물씬 느꼈던 이질적인 풍경과 느낌이 집에서도 남아있곤 했을 정도였었다.



그런데 그런 도돌이표 감성이 어른이라는 딱지를 단 이후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풍경에도, 다른 세상과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도 나의 세계관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청소년기 시절이었던 때를 한 번 떠올려 봐라. 누구라도 붙잡고 한 삼십 분간만 대화해도 상대방의 말보다 그 사람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나와 다른 이질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 사람의 말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아니면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말이다.



나의 중학생 시절만 해도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거나 엉덩이에 매를 맞는 것은 지난한 일상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반장이었던 내가 영어숙제를 한 번 까먹고 안 해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영어선생님은 영국식 콩글리시 발음의 쌍팔년도 시대에 배운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만의 유머코드를 가진 분이었던지라 숙제 안 해온 반 녀석들을 일렬로 줄을 세워서 한 명씩 따귀를 때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돌게 하여 또 따귀를 때리는 '교실 한 바퀴(이데아?)'를 즐기곤 했었다.



그 가운데 그 따귀를 맞고 한 바퀴 돌 때마다 숙제를 해온 녀석들은 자리에 앉아서 키득키득거리는 얼굴들이 가관이었다. 맞는 애들은 비극이지만, 그 모습을 더 멀리서 보면 웃고 있는 녀석들로 인해 희극으로 바뀌는 장면이 떠올려지는가?



그 선생님의 무식한 숙제(교과서 본문을 10번씩 써오게 했던 거 같다.)를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그런 주입식이 영어공부에 제격이라는 것을 오늘날 깨달은 것은 그 은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그 추억을 그냥 머그면서 또 울상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감성은 무뎌지더라도, 다시 본인을 감성화 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래 아래 세 가지의 작품(영화, 원서, 그리고 철학책)을 들춰보면서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곱씹게 만들었다. 도돌이표의 개인 일생을 넘어 역사라는 것도 클래식 피아노 합주곡이나 변주곡처럼 기존의 시대를 변주하면서 다 함께 돌고 도는 게 아닌지의 궁상까지 하게 만들었다(임현정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들으면서 말이다).



나라는 사람도 이미 한 오백만 번은 우주의 빅뱅을 거쳐 끊임없이 반복된 연대기 속 하나의 변주곡에 불과한 티끌 아닐까? 내가 죽더라고 우주의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약간의 간극(시간차)이 지나 또 태어나서 변주된 인생으로 다시 펼쳐지는 연대기 속의 보일 듯 말 듯한 점(일개의 생애)과 같은 서사가 반복되는 게 아닐까? 안드로메다 은하조차도 이미 한 오백 번은 되풀이된 은하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우주의 티끌이 아닐까?


'수호자' 원서, 존 그리샴의 작품이 오랜만에 법정 스릴러로 되돌아왔다.



첫 작품은 존 그리샴이라는 미국 스릴러 작가가 올해 내놓은 '수호자(The Guardians)'라는 원서다. 원어민도 권장하는 이런 통속소설로 영어를 익히면 그들의 일상어 말투(구어체)를 쉽게 체득할 수 있어서 속독실력향상뿐만 스피킹 실력까지 노릴 수 있다. 본인은 한국어 번역본 초반부만 몇 번 훑어보고, 한 번은 묵독, 그리고 음독으로 반복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의 주인공(Post)은 국선 변호사 출신으로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들의 삶을 말 그대로 '수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가 변호하는 사형수들은 잘못된 증거와 변호로 인한 살인누명으로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가 지켜내지 못해서 형의 집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형수의 죽음을 본 이후, 형집행 카운트다운의 노역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 아는가? 브래드 피트가 가장 터프하게 출연했던 영화, '파이트 클럽'의 감독이다. 그가 만든 '더 킬러'. 주인공, 킬러의 복수극이 재밌다.



어제저녁에만 횟수로 세 번째 본 영화는 넷플릭스로 본 '더 킬러'라는 영화다. 청부살인업자(킬러) 역을 맡은 영화 주인공의 독백이 초반부에 많다. 그중 한 대목이 와닿았다. 그가 죽이는 일인은 작금의 전 인류 78억 명의 증감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그의 말은 솔깃(?)하기까지 했다.


어떤 이 누군지 모르겠다
매년 1억 4천만 명이 태어난다

얼추 그렇다 세계 인구는 대략 78억 명이다
매초 1.8명이 죽는다

그리고 그 매초 4.2명이 태어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이 지표엔 영향이 없다

사람들은 종종 회의를 냉소로 오인한다
사후 세계가 차갑고 무한한 공허란 걸...




마지막으로 9년 전에 내가 외지에서 근무할 때, 집(부산)으로 오는 무궁화호 열차 승차권(입석)이 마지막 페이지에 꽂혀 있는 철학서다. 바로 알베르 카뮈(영어발음으로는 까뮤)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이다. 십여 년 전 이 책을 서점에서 골라서 훑어봤을 때 기억나는 내용 중 하나인 카뮈의 회고는 압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날(아마도 알제리의 1930년대) 아침에 광장에서 벌여진 단두대에서의 처형 장면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구토하는 모습을 봤다는 카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그러나 그는 실존주의와 결별한)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고등학교 은사, '장 그리니에'라는 알제리 국립대 교수로부터 사사하였다. 알베르 카뮈의 생애에 관한 문집 2권(‘카뮈, 지상의 인간’)도 소장만 하고는 있느나, 카뮈 하면 '이방인'이 한국인이 잘 아는 문학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책에서 사형 제도의 본질은 복수라는 결론을 냈다. 사형이라는 것은 어떠한 품위도 지니지 않는 살인충동만 부치기는 사회악이라고 말이다.




세 작품 모두 '죽음'에 관한 얘기들이다. 한 세계는 누명을 쓴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몇 분 몇 초라도 아껴서 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고, 다른 세계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 끝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끝장내고 만다. 그리고 사형과 살인충동에 대해서 관조하며 사색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같은 세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세 가지의 세계관이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오늘도 그와 같은 세계들은 계속해서 변주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78억 개의 세상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가?



타인을 살리지 못해서 일분일초라도 아까운 삶? 혹은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삶? 아닐 테면 죽음에 대해 관망하고 있는가?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다. 우주 속 일개의 미물일지라도 당신의 세계관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 그 우주는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 변주되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뭐 하러 열심히 살아?



이게 결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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