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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Mar 07. 2023

우린 살고 싶다

하지만 왜 스스로를 죽이고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호흡이다. 우리 몸에 늘 산소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먹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호흡보다 먹을 것이 더 중요하긴 하다. 단지 호흡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먹을 것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에 비해 무척 짧다. 기껏해야 5분도 채 안되니까.


중요도를 따지면 먹을 것이 훨씬 더 중요한데, 그것이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호흡이 훨씬 짧다. 왜 그럴까? 어떤 것의 중요도는 그것의 진짜 가치가 아닌 얼마나 흔하냐 혹은 귀하냐 여부로 결정돼서 그렇다.


산소는 흔하다. 그냥 흔한 정도가 아니라 없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깊은 동굴이나, 물 속이나, 아주 높은 산이 아니라면 공기는 그야말로 거의 무한대로 주어진다. 그러니 그것을 딱히 저장할 필요가 없다. 만약 공기가 구하기 힘들었다면 우리 몸은 온몸에 지방을 축적하는 것처럼 공기를 온몸에 축적해 뒀을 것이다. 대신 호흡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세 번째는 집이나 옷과 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생존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있다. 더해서 불도 여기에 낄 수 있다. 열대지방처럼 늘 따뜻하고 딱히 안전을 위협하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면 없어도 되긴 하지만 아무튼 갖추면 갖출수록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공기에 흔히 말하는 의.식.주를 더한 후 불 정도만 구비하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최소한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바로 무리 짓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혼자 할 수밖에 없는 호흡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해져버리고 말았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불도 관계로 구할 수 있다. 더해서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적과 함께 싸울 수도 있고, 내가 잘 때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기도 한다. 나를 즐겁고 재미있게 해주기도 하고, 사실상 내가 사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관계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며 매우 광범위하게 생존에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다 보니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통해 생존해 온 우리의 본능은 혼자 있게 되면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불안해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이 다 있어도 혼자 살게 되면 심심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지루함, 외로움, 고독감, 불안함, 우울함, 허무함까지도 느끼다가 결국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 답은 쉽다. 남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최대한 많으면 되고, 그것을 적절하게 주고받으면 된다.


물론 주고받음엔 필수조건 있다. 내가 뭔가를 줬을 때 상대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줄 것이라는, 신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평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며 그들을 '동료'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좀 더 발전하면 신용을 넘어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우리는 그 존재들은 '친구'라고 구분해 내서 따로 챙긴다.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감정도 주고받는다. 즐거움도 주고받을 수 있고, 기쁨도 주고받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주고받을 수 있다. 동료는 주로 돈과 같은 유형 것들을, 친구는 주로 즐거움과 같은 무형의 것들을, 가족은 그 모두를 주고받는다.


유형의 것들에 비해서 무형의 것들은 마치 디지털 자료처럼 준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무한대로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사람,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기쁨을 주는 사람만큼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매력 있다고 평한다. 사실 매력이란 말 자체가 누군가가 얼마나 남들에게 쓸모 있어 보이는가에 대한 사람들마다의 주관적 판단이다.


주관적이라고 해도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은 아니고 보통 외모, 성격, 성품 등은 다들 선호한다. 더해서 돈, 사회적 지위, 다양한 재주, 신체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 등도 꽤나 선호도가 높은 매력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가지면 가질수록 관계를 맺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들 갖고 싶지만 갖기가 쉽지 않다. 이미 타고난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우린 다들 너무 깊게 관계에 중독되어 있다. 사실상 없으면 못 산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관계를 잘해야만 한다. 그때 우리가 선택 가능한 거의 유일한 무기가 바로 '착함'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착한 척'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착하게 굴면 관계가 잘 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겨난다. 다른 많은 장점들은 이미 타고난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노력해서 갖기가 힘들지만 착한 척은 어느 정도 연기를 할 수 있다. 단지 대상을 잘 골라야 한다는, 정말로 잘 골라야 한다는 필수조건이 있다. 까딱하면 사기꾼에게서 당하듯 잘해주고는 결국 배신을 당할 수 있다. 심지어 이것은 고소도 하지 못한다.


사실은 나를 위해서 관계를 잘하려고 한 것이지만 겉으로는 오직 너를 위해서 잘해주려고 했던 행동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흔히 '상처'라고 한다. 물론 우리는 상처를 받는 이유가 훨씬 더 다양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대부분의 상처는 결국 관계 속에서 제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생겨나고 있다. 무엇인가를 줬지만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한 친구를 늘 우선순위로 두고 대해줬는데 정작 그 친구는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줬지만 친구는 나에게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믿음을 줬지만 받지 못한 것, 신경을 써줬지만 신경쓰임을 받지 못한 것, 나는 돈을 썼지만 상대는 돈을 쓰지 않는 것, 도움을 줬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중요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친절하게 대했지만 친절을 받기커녕 무시당한 것, 그것이 무엇이든 줬다고 느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면 배신감이 들고 상처를 입는다. 더해서 내가 그 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이 든다.


사실 외모, 성격, 재력, 지위, 재주, 능력 등등 많은 매력을 가졌다고 해도 착한 척을 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바로 '싸가지 없는 인간'이 되어서 많은 받을 수 있는 것을 놓칠 수 있다. 연예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세상 착한 사람처럼 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매력이 있든 없든 진심이든 아니든 가능하면 착한 척을 하는 것, 그러니까 온화한 태도, 예의 바른 말투, 배려심 있는 행동,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 겸손함 등은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셈이다.


그런데 이 세상엔 왜 이렇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까? 정말로 죽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반대로 관계를 깨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짓이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남에게 착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런데도 왜 반대로 할까? 다른 사람들에게 막말하고, 무시하고, 불편하게 하고, 배려하지 않고, 잘난 척하고, 타인의 아픔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이런 행동들은 사실상 일종의 서서히 진행되는 자살인셈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살까?


원인은 하나뿐이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 그렇다.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배신으로부터 생겨난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그로 인한 분노, 이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불신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니까 나를 믿지 못하는 만큼이나 남도 믿지 못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믿지 못할 사람에게 딱히 잘 보일 필요가 있을까? 더 이상 착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


주변에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나쁜 영향력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내면엔 동일하게 자기 불신이 깊게 새겨져 있다. 너무 깊숙하게 새겨져서 스스로를 자살로 몰고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인해 타인에게 끝없이 화를 낸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인해 타인을 끝없이 빈정거리고 틈만 나면 무시한다.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타인의 성취를 끝없이 끌어내리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잘하는 것이 있으면 자랑하지 않고는 버텨내질 못한다. 하지만 평소에 했던 짓으로 인해 주변에 자랑을 들어줄 사람도 없다.


우리는 살다가 가끔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비슷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피하려고 애쓴다. 막 내뱉는 말을 미처 피하지 못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도 그런 모습이 있다. 우리들도 그들보다는 낫지만 역시나 자기 불신이 존재한다. 그것이 아주 가끔 운이 안 좋은 날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막말하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누군가를 무시한다.


두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마다 내면에 존재하는 자기 불신의 낙인이다. 그 낙인이 깊은 사람들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또 하나는 지금은 멀쩡한 우리라고 해도 많은 상처를 받게 되면 언제든 그 낙인이 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은 아주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살아오면서 운이 나빴을 뿐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들보다 살짝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만약 그들에게 좀 더 나은 얼굴, 큰 키, 좋은 몸매, 높은 IQ,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살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런 상처들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도 역시 배려심 있고, 예의 있게 말하고, 타인을 공감하면서 어울려 살아갔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운 좋게 그런 것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지금 내가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곳에 큰 용기를 내지 않고도 이런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것도 운 좋게 그 정도의 자기 신뢰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껏 내 삶에서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에 이를 만큼 큰 상처는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바라볼 때, 또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계로 인해 불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과도한 비난과 혐오를 느낄 필요까지는 없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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