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검
중세 시대를 살았던 기사들에 대해 상상을 해 보면 비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온몸을 감싼 은색으로 번뜩이는 갑옷, 멋진 군마, 기사를 시중드는 종자, 지키기로 맹세한 여인, 날카로움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멋진 검, 대충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이 중에서 갑옷은 유난히 기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위에 나열한 것들을 대부분 갖췄지만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을 보고 우리가 '아, 저 사람은 기사다'라고 선뜻 단정하긴 힘들다.
그만큼 미스릴, 사슬, 판금 등으로 만들어진 멋진 갑옷은 기사에게 있어서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갑옷의 중요성은 기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갑옷은 적들의 칼이나 창, 혹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로부터 기사의 몸을 보호해 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갑옷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갑옷은 그만큼이나 커다란 문제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단단함과 견고함으로 인해 입고 있는 기사의 몸 움직임을 제한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물론 강한 근력을 가진 기사들은 그조차 어느 정도 극복해 냈지만, 갑옷은 혼자서 입고 벗지도 못할 만큼 번거로워서 결국 늘 종자 한 명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옷은 일종의 경계선이다. 그래서 기사는 갑옷을 경계로 세상과 그 자신을 분리시킨다. 그 분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기사의 몸은 안전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자신은 갑옷에 의해 억압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너무 두꺼워진 갑옷은 기사 본인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만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밖의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수많은 공격들이 들어오고 그때마다 적절하게 대응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아서 자주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 상처를 받는 순간들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린 살아가기 위해서 중세의 기사처럼 갑옷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몸을 튼튼하게 하고 정신도 강해지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들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갑옷이 가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갑옷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안전해지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점점 사라지고 만다.
어느 날 우연히 들었던 물을 조심하라는 점쟁이의 말을 따라 수영장도, 계곡도, 바닷가도, 심지어 목욕탕도 안 가는 삶을 살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서 수영의 즐거움도, 계곡의 차갑고 맑은 물에 발을 담글 기회도,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멋진 광경을 볼 기회도, 몸을 깨끗하게 씻을 기회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만 따지자면 갑옷은 가능하다면 없는 게 좋긴 하다. 물론 아예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진 갑옷에 관한 큰 문제는 갑옷이 가진 그런 단점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알려진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이 아니라는, 증권가에 떠도는 말처럼 그렇다.
갑옷의 단점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현재 어떤 갑옷을 입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각자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게 된 갑옷이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자기 피부의 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가진 갑옷을 자각하지 못한다.
더러운 세균이나 위험한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갑옷은 집청소와 씻기이다. 집이 깨끗할수록, 몸을 자주 깨끗이 씻을수록 우리는 세균과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은 귀찮은 면도 있지만 하고 나면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하며 집안을 깨끗하게 하고 자주 씻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갑옷이다. 집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 좋지만 깨끗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갑옷은 입는 것이 좋긴 하지만 갑옷이 없다는 이유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갑옷이 없다는 이유로 평생 집 안에서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살다가 보면 집 청소를 못하는 날도 있고 몸을 씻지 못하는 날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런데 만약 그런 순간마다 참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갑옷이 너무 두꺼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렇게 청결에 관해 과도하게 두꺼운 갑옷을 입은 사람을 '결벽증 환자'라고 칭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갑옷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은 세계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놓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꾸준히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노력을 하다가 보면 마치 집청소나 샤워를 끝낸 후처럼 많은 좋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나쁜 감정들을 느낄 경우도 꽤나 많다. 그러다 보니 관계는 마치 불처럼 너무 가까우면 데고 너무 멀면 추운 그런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관계 속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에게 있어서 관계는 더 이상 갑옷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피부와 일체화된 갑옷으로 나에게서 분리하려 들면 피부가 뜯기고 피가 나게 된다.
인기, 인정, 관심, 사랑, 집중, 우선순위, 보살핌, 충성, 존경 등등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얻기를 기대하는 다양한 기대치들이다. 이런 것들은 갑옷의 중요한 효용이며 있으면 있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갑옷의 역할을 더욱더 강화시켜 준다. 하지만 당연히 그 반대급부가 존재한다.
단순히 따져서 인기가 많고 관심을 많이 받는 유명한 연예인들은 어디 한 군데 마음 편히 가가기 쉽지 않다. 그 유명세가 그들의 자유를 막는 것이다.
우리들 개개인은 인기가 많고 잘 알려진 연예인들이 아니라서 그런 경험을 할 리는 없지만, 아무튼 우리들 역시도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라는 갑옷 안에서 제약을 받게 된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그 안에서 제약을 받은 탓에 이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해져서 그것이 나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끝없이 관계 맺음을 추구한다. 그나마 우리들이 선택 가능한 전략은 바로 '쿨 함'이다. 쿨하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문제는 쿨할수록 관계가 가진 갑옷의 성능, 그러니까 나의 안전을 지켜주는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점이다. 기사가 입은 갑옷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은색으로 칠한 플라스틱으로 만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화살이 와서 꽂히기 전까지만 그럴듯할 것이다.
쿨한 관계는, 그러니까 가벼워진 관계는 관계가 가진 진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관계의 갑옷에 일체화된 우리들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관계라는 갑옷을 갖추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그 후엔 화살이 와서 꽂히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아간다. 사실 그 조차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플라스틱 갑옷을 입고 있음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중요한 갑옷 중 하나이다. 하지만 끝없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은 돈도 사실은 일정 수준만 있으면 된다. 대체로 먹고살만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거기에서 머물지 못한다. 마치 너무도 안전해지고 싶어서 무한대로 두꺼워질 수 있는 갑옷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돈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을 느낀다.
남들이 보여주는, 돈으로 만들어진 아주 두꺼운 갑옷을 볼 때마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갑옷이 초라해져서 그 불안함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돈은 이제 '내가 필요한 수준'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서 '얼마큼 많으냐'의 정도가 중요한 판단 기준점이 되었다.
명성, 권력, 봉사 등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부분의 욕망은 모두 다 갑옷에 관한 것들이다.
갑옷은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만 제한되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남들에게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그들의 무모함이 우리의 안전함에 대한 상상을 깨니까 말이다. 그래서 가끔 갑옷을 입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비난하거나, 말리거나, 멀리 하거나, 가까이하면 위험하다고 느낀다.
상대방으로 인해 두 가지 두려움이 자극되어서 그렇다.
하나는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일 때를 상상해서 만들어지는 벌거벗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하나는 내가 그들이 혹시나 누리고 있을지도 모를 자유로움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이다. 이 둘 모두 우리를 자극시켜서 상대방에게 괜한 쓸데없는 참견과 훈수를 두게 만들고 만다.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들, 남들에게서 느껴지는 막연한 불안함, 이것들은 모두 갑옷이 만들어 내고 있는 단점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라서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이 갑옷이 만들어 내고 있는 부작용임을 인식할 수는 있다.
집이 좀 더러워도 된다. 관계를 좀 덜 맺어도 된다. 돈이 그리 많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그것들이 필요하지 그것들을 위해서 살 필요는 없다. 깨끗함, 관계, 돈과 같은 것들은 그저 사는데 중요한 필요성이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단지 우리 스스로 그것들이 결국엔 나 스스로 만들어 낸 갑옷임을 자각해 낼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난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