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Mar 20. 2024

걱정을 걱정하다

살아있는 자의 의무

내일은 월요일이다. 그러니 출근을 해야 한다. 그런데 회사 가기는 정말로 싫다.


이르면 일요일 오후쯤? 아니면 저녁을 먹고 난 후부터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드는 은근히 걱정스럽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아예 월요병이라는 표현이 있다.


걱정, 이 단어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다. 단지 월요일 출근처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에 때로는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들 삶에서는 참 많은 걱정거리들이 있다. 소소한 것으로는 다음 주 있는 회사 회식자리일 수도 있고 심각한 것으로는 작년에 올해 건강검진을 앞두고 작년에 발견되어 추적을 해봐야 한다고 했던 작은 종양의 상태일 수도 있다. 짧게는 내일 있을 시험이 있을 수 있고, 길게는 직장을 구하는 일일 수 있고, 아주 길게는 노후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고,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크게 성공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어떤 걱정도 없을 수는 없다. 걱정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절대로 떼어 낼 수 없는 불쾌한 동반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걱정을 줄이고, 아니 아예 없애고 싶어 한다. 결국 불가능하지만 열심히 노력은 한다. 걱정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해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금세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내가 걱정 없이  사는 꼴을 보지 못한다는 듯 갑자기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그나마 내가 괜찮으면 가족에게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걱정 없이 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까?


냉정히 말해서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 어떤 종류의 걱정이라도 완벽히 없앨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걱정을 만들어 내는 원인 자체를 없애면 된다.


월요일 출근이 걱정이라면 회사를 그만 두면 된다. 시험을 망칠까 봐 걱정이라면 시험을 보지 않으면 된다.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라면 사람 자체를 만나지 않으면 된다. 암에 걸려 치료를 받을 일이 걱정이라면 더 이상 살지 않으면 된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을 할 것이다. 도대체 그딴 게 해결책이냐고. 욕을 들을만한 말이긴 하다. 그럼에도 사실은 사실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다.


비슷한 예로 고통이 있다. 그리고 그 해결책도 걱정과 같다.


손가락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우면 손을 자르면 된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하기도 한다. 마음이 너무 아프면 기억을 삭제하면 된다. 온몸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죽으면 된다. 죽은 몸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너무 불행하다고 느껴도 마찬가지다. 죽으면 불행을 못 느낀다.




왜 이런 황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험을 망칠까 봐 걱정스러우면 시험을 보지 말고, 어딘가 아프면 그 부위를 잘라내고, 삶이 고통스러우면 죽으라니...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결책이라고 해대고 있는 것일까?


그냥 걱정, 고통, 불행을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봤으면 해서다. 배고픔은 일종의 고통이지만 맛난 먹을 것이 있을 때는 또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야말로 시장이 반찬이다. 배가 터지도록 부를 때 비싸고 고급진 수제 케이크와 배가 엄청 고플 때 편의점에서 파는 비닐봉지에 든 싸구려 빵 중 누가 더 맛있을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비싸고 고급진 수제 빵이 더 맛이 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가지게 된 일종의 음식에 대한 자존심이다. 그런데 만약 어디선가 길을 잃어 한 열흘 먹지 못했을 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배고픔은 우리가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생겨나는 고통이다. 출근에 대한 걱정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에 생겨나는 두려움이다. 어딘가를 다쳐서 아프다면 치료를 해야 하기에 생겨나는 고통이다. 만약 어딘가를 다쳤는데 아프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결국 그 상처가 덧나서 죽게 된다.


물론 그 어떤 걱정도, 고통도, 불행도 가능하면 안 느끼는 편이 좋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확실히 있다. 부정이 없다면 긍정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관한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명확하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정한 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마다 꽤나 힘들다. 그것들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로 걱정, 고통, 불행은 그 이상의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걱정이 많은 자신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기 시작한다.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두렵기 시작한다.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깊고 강한 분노가 치민다. 자신과 달리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어 보이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인해 삶이 망가진다.


그냥 걱정이고, 그냥 고통이고, 그냥 두렵고, 그냥 불행인데, 사실 죽음을 앞두면 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고 마는, 결국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당장 힘드니까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아예 없애려고 한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자신에 대한 비하와 경험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 속에서 살아간다.


월요일은 화요일이 되기 마련이고, 상처는 언젠가 낫기 마련이고, 아무리 큰 두려움도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큰 불행도 언젠간 추억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도 그렇다.


도대체 왜 우린 그토록 삶의 본질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정의하려고 할까? 새롭게 만난 남자 친구가 의사라서 너무 바빠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고 징징대는 친구 때문일까? 무심코 흘러나온 회사 동료의 높은 연봉 때문일까? SNS 속 사람들의 모습이 다들 너무 행복해서일까? 너무도 넓고 좋은 집에 사는 TV 속 연예인의 모습 때문일까?


우리의 아무런 근거 없는 희망과 달리 삶은 오히려 어둡고 부정적이다. 열심히 만들지도 않고 열심히 파괴하지도 않는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는 원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어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런 삶을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은 늘 죽음으로 향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멍을 하기 위해서 불을 피울 땐 피어나는 연기로 인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음식 쓰레기가 없는 요리는 존재할 수 없다. 아프지 않다면 건강한 삶도 무의미해진다. 소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음악도 없다. 이 세상에 현실이 없는 낭만은 없다. 모든 행복한 것들은 반드시 불행을 딛고 서 있다. 혹시나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주고 있어서 그렇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그랬고, 커서는 누군가에게 돈을 줬기에 그렇다.


물론 아무리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걱정, 고통, 두려움, 불행 자체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로 인해 생겨난 두 번째 문제들, 자신의 삶에 대한 비관이나 타인에 대한 분노 정도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사실 그것만 할 수 있어도 삶의 난이도는 많이 낮아진다.


걱정을, 고통을, 불행을 아주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들은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들은 내가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내가 살고 싶다는 확실한 의지이다. 내가 살아가야 할 눈에 보이는 목표이다. 결국 그것들은 내 의지를 만들어 내고, 내 노력을 이끌어 내며, 내가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게 되는 이유가 된다.


오직 지금 내가 살아있기에,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하기에, 결국 우리들에게 살고 싶은 미래가 있기에 감당해야 할 몫이다. 당장 내일 죽게 된다면 그 어떤 걱정도, 고통도, 두려움도, 불행도 금세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그 순간만큼은 우린 완벽히 평화로운 상태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고 싶은가?



작가의 이전글 감정 바라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