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될 일은 될지도...
인간이라면, 보통 딱히 정신적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에서 '자유'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복잡하고 딱딱한 철학적 담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누가 오늘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주말에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뭐, 딱히 머릿속에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가 떠오르지 않아서라면 조금 곤란할지는 모르지만.
'자유롭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입장이 있겠지만, 이것을 매우 단순화시키셔 보면 그냥 보통은 '선택의 자유'를 뜻한다. 원래 무엇인가를 내가 하고픈대로 하는 것이란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선택을 하는 삶을 원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가 보면 가끔 이 말이 잘 맞지 않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자신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사람, 자발적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되어서 선택 자체를 피하려는 사람, 결정장애에 걸려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 선택 자체는 하지만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등등 참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정말로 자유로움을 원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선택의 권리를 스스로 버리는 것일까?
뭐,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자기 신뢰와 책임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자신을 스스로 믿지 못하니 나보다 나아 보이는 이의 선택을 따르려고 하거나 선택 후에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회피하는 것이다.
사실 신뢰와 책임은 각자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결국엔 책임으로 귀결되긴 한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의 결과를 보통은 부정적으로 예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많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모든 선택은 반드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택은 원하지만 책임을 지는 것 자체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 선택으로 인해 뭐가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만큼 감당하기 힘든 일도 없다.
책임의 무게가 무겁기에 피하고 싶지만 자신이 하고픈 일을 선택하는 자유는 누리고 싶은 것, 이 두 가지 양립하지 힘든 욕구가 충돌하면서 누가 딱히 말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였다면 그래도 크게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보다 더 나아 보이는 사람의 선택을 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자유로움을 포기하는 대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단지 그럴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행복 난이도가 조금 더 높아질 뿐이다.
현실에서는 거기에 한 가지가 더 달라붙는다. 그것은 바로 선택의 결과가 아주 좋을 경우 받을 수 있는 '선택을 성공한 자'에 대한 칭송이나 혹은 보상이다.
내가 저녁을 뭘 먹을지를 선택했을 때는 기껏해야 맛난 저녁 식사 정도가 최고의 보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모임에서 모일 장소를 선택했는데 그 집이 맛집이라서 다들 당신의 선택을 칭찬하게 되면 그것은 아주 큰 보상이 될 수 있다. 식당 선택 정도야 딱히 별 것도 아니지만 미래의 회사 먹거리를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사장은 제대로 잘 되었을 때 아주 큰 칭송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삶에서 빛나는 훈장이 되어 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약 선택이 잘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타인의 인정과 그에 따른 보상에 대한 욕구 때문에 마냥 타인의 선택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는 제 삼의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택을 하고는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든 회피하거나 변명해서 내 책임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하거나, 사실은 타인의 선택을 따라서 해놓고도 스스로는 내가 선택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이 둘 모두 사람들이 아주 자주 써먹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선택을 하고는 잘되면 내 탓이고 잘 안 되는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과, 끝없이 선행된 타인의 선택을 따라 하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선택을 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불안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선택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선택을 한 후 뭔가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 감당할 수만 있어도 자책은 하지만 남의 탓은 안 할 수 있다. 물론 일이 잘못될 때 남의 잘못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자체도 역시 내 선택의 결과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차에 치여도 그 시작엔 그 길을 걷게 된 '나의 선택'이 우선하고 있다. 물론 그럴 경우 이후 절차는 잘못을 한 차의 운전자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되겠지만, 그 시작이 나의 선택임을 인지는 할 수 있다.
회사를 가기 위해서 나선 길에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니까.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성적으로만 말하면 회사를 다니겠다고 한 것도 결국 내 선택이다. 내 삶에서 그 어떤 것이 내 선택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회사를 가야 한다고 말했고, 내가 회사를 갔다고 해서 그것이 내 선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의 최종 결론은 내 선택임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뜻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를 내려놓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왜 스스로 종속적인 삶을 선택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선택은 하되 적당히 책임은 회피하면서, 선택 자체를 타인에게 맡겨놓고는 스스로는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예 누군가의 종속적인 존재가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뭐, 인간이란 존재의 불완전성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행히 제 삼의 길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길이다.
언뜻 들으면 그저 말장난 같지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순응'이다. 그러니까 내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오랫동안 숨겨져 온 진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고 싶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지만, 그 욕구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다. 그냥 우연히 태어났더니 가지게 된 본성이다. 물론 본성이라고 해서 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초에 내가 그런 본성을 갖도록 선택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는데 이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짜장과 짬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는 대부분의 경우 중국집이라는 상황이 우선하고 있다. 한식집에 들어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선택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야말로 될 일은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운 좋게 잘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은 안 될 일은 안된다,라는 부정적 의미 역시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고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라는 말이 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선택의 자유'는 처음부터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고 매일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하게 되면 오히려 그때 뜻하지 않은 자유로움을 얻을 수도 있다.
너무도 오랫동안 내 삶의 뒤를 쫓아온 '죽음의 공포'라는 녀석으로부터 처음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 공포가 그동안 활력을 만들어 내고, 삶의 의지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원하도록 만들어 내고, 뭔가 이루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선택의 자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더라도 그런 행복감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 된다. 그저 죽음에 쫓기기 때문에 만들어진, 사실상은 전혀 내 선택이 아닌 결과들이다. 내 감정은 성공의 기쁨에 날뛰겠지만 나 스스로 즐기기만 할 뿐 딱히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반대로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경우에도 기분은 많이 나쁘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나를 자책하거나 타인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잘난 존재가 되고 싶기에 결국엔 자책을 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죽기 싫어서 열심히 산 것과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왜 한쌍의 짝이 되어야 할까? 장수하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일까? 그런데도 우리는 정말로 많은 다양한 곳에서 자신이 오래 살 것이라고 자랑하는 말을 듣고, 사진을 보고, 글을 읽는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저 열심히 살고 즐거우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삶을 선택하는지도 일종의 선택이다. 하지만 삶이 좀 힘들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아무리 똑똑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옳다고 느껴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