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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린 그리 착하지 않다

단지 그래야 할 뿐.

by 전찬우

사람들은, 그것도 꽤나 많은 사람들은 대 놓고 말은 안 해도 속으로 자신이 나름대로 착하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꽤나 착하다. 단지 사람들이 착한 이유는, 우리 스스로 정의해 놓은 착함과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선하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착하다는 것은 약한 것이다.


착함이란 성향은 두려움과 아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고 해도 무리한 것이 아닐 정도로 관련이 깊다. 그저 착함의 이유는 나름대로 다양하며, 그 다양성으로 인해서 평소에 우리가 착함과 두려움과의 관계를 잘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약할 때 착해진다. 예를 들어서 집에 강도가 들어와 칼로 위협을 할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착해진다. 강도는 아주 나쁜 놈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놈을 처단해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대부분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러니 대신 우리는 그놈이 하는 말을 모두 다 들어주려고 애쓴다. 가지고 있는 귀한 보석이나 피같이 아까운 돈을 다 건네주고, 신용카드나 심지어 통장과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마동석처럼 생긴 사람을 만나게 돼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상대의 덩치가 아주 크고 어깨부터 손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문신까지 한 상태라면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해 어떤 공격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게 된다. 설령 살짝 부딪히게 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밝은 미소가 나오면서 입으로 죄송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 상황에서는 내 잘못이냐 상대 잘못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만 따지게 된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따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단순히 그냥 멍청하거나 특수부대 출신으로 아주 뛰어난 무술 능력이 있는 경우이다. 혹은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큰 부자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강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러니 약하지 않을 때만 그런 반응이 가능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강도이거나 마동석이 아님에도 우리는 평소에 착하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 이유는,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꽤나 곤란한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좋은 관계'는 우리의 삶에서 꽤 중요한 윤활유 역할을 한다. 반대로 '적대적 관계'는 삶을 매우 피곤하게 만들고, 하려고 하는 일을 몹시 꼬이게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 밖에 나서 생겨난 괘씸죄는 그 어떤 것 보다도 강력한 방해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능하다면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애쓴다. 그것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평소에 착하게 구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면 딱히 착하게 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력이나 권력을 얻을수록 기본적으로 덜 착해진다. 하지만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강함을 착각해서 함부로 굴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도 가끔 보인다.


이렇게 착함이란 태도는 기본적으로 나한테 적대적일 수 있는 대상을 향해 억지로 착하게 굴거나 혹은 나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혹은 이득을 얻는데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 착하게 구는 정도에서 대부분 마무리된다. 그래서 원래 착하게 살더라도 큰 문제는 없어야 정상이다. 오히려 도움이 될 때가 훨씬 많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착함이 문제가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과도하게 착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그래서 계속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러니 힘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보면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육체적으로 아주 약하고 더해서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일반적으로 강하다는 것에는 보통은 육체적 면이 강조되지만 오히려 생각보다 정신적인 영향이 크다. 그리고 육체적 강함에는 강한 근력이 필수적이듯, 정신적 강함에는 세상에 관한 다양한 많은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은 경험이 적기 때문에 강해지기가 힘들다.


어린아이들은 커가면서 육체적 성장과 함께 세상에 대한 경험도 점점 더 쌓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거스르려고 한다. 자기가 하고픈 대로 하려고 한다. 반항도 하고 싸우려고도 하고 어른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다기도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쌓이면서 어린아이 시절과 같은 착함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어떤 이유들로 인해 육체적으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적으로 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어른이, 세상이 두렵다. 그래서 불필요할 만큼 착하게 살아간다.


이와 달리 이미 충분히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착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착함은 약함에 의한 착함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도 여전히 약함에 의한 착함이 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과 삶 앞에서 강해질 수 없다.


오늘의 세계 복싱 챔피언도 내일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고, 세계 최고의 부자도 암에 걸리면 속절없이 죽는다.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오며, 죽음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절대로 강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정화수를 떠 놓고 빌듯이 '어떤 식으로든 착하게 살면' 죽음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평소에 타인들에게 잘해 놓으면 나중에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평소에 인덕을 쌓아 두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죽음을 막아주지는 못해도 평소에 살아갈 때 꽤나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너무도 큰 불행이 찾아오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꽤나 착하게 살아왔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불운이 생겨난 것일까?'


사실 어떤 불운이 착하게 살아온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면서 억울함이 느껴진다. 정말로 나쁜 놈들은 오늘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오히려 착하게 살아온 나는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억울함이 가진 의미가 그것이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큰 불행 없이 오랫동안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이 보다 더 한 단계 더 나간 사람들은 그 자신이 착하게 사는 것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하고, 더해서 그것이 우리 전체를 좀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런 성장에 올라 선 사람들은 착함에 대한 불필요한 가치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착함이 옳은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목적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착하지 않음에 대해서 딱히 신경 쓰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착함에만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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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사는 것은 당장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인생 전체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경우 아주 현명한 삶의 태도이다. 남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안심하면서 덜 불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죽음 이후에도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착하게 사는 것이 좋다. 나에게 그것보다 더 큰 이득도 드물다. 단지 스스로 착각만 안 하면 된다. 우리는 선하거나 정의롭지 않다. 그저 약한 것이다. 약하니 착하게 살 수밖에 없다. 죽음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만약 자신이 너무 착해서 문제라고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약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누군가와 갈등을 겪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여전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인지, 사람들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확신이 없는 것인지, 주변 사람들의 감정 흐름을 잘 읽지 못해서 일단 웃고 봐야 하는 것인지, 몸은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착하게 살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두려운 것인지, 착하지 않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운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은 영리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착하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태도는 아니다. 특히 요즘 시대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세상에서는 착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


수십 년 전에 활동했던 예쁘고 잘 생긴 연예인들의 얼굴과 요즘 인기가 많은 연예인들의 외모를 비교해 보면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예전엔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사람들이 예쁘고 잘 생겼다고 하면서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눈매가 매서운 날카로운 외모가 훨씬 더 인기가 많다. 착한 사람보다 세상과 잘 싸울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더 잘생겼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착함이 가진 장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통하는 처세술이다.


단지 결코 착함을 선이나 옳음이나 정의로움과 연관시키면 안 된다. 착함은 그저 약함일 뿐이다. 그리고 약하다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며 우리 인간은 결국 누구나 약하다. 강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더 강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내 착함을 근거로 타인의 악함을 비난하는 것은 착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아주 오래되고 치명적으로 문제가 있는 태도이다. 착하기만 한 나에 대한 불만을 만들고 착하지 않은 타인을 싫어하게 만든다. 나는 약해서 착한 것이고 상대는 충분히 강하든,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든, 몹시 멍청하든, 자신을 포기했기에 강한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강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잃을 것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착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행동의 제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말로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똑똑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착함을 근거로 타인의 행동을 제단하고 비난하지만 않는다면, 착함을 결코 나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더 착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참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내가 약하기 때문에' 착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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