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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05. 2022

의지박약

나는 왜 의지가 부족할까?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뜨끔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아니, 탓한다.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부족할까?"


평소엔 잘 못 느끼지만, 시간을 두고 조금 생각을 해보면 인간의 언어 표현들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서울이나 낙동강과 같은 고유명사와 산, 바다와 같은 얼마간의 명사들을 빼고는 모두 다 비교 대상이 있는 상대적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쁘다는 못생겼다, 맛없다는 맛있다, 어둠은 밝음의 상대적 표현이다. 결국 '의지가 부족하다'라는 표현에서 '부족하다'는 의지가 넘치는 사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의지가 넘쳐나고 있는 것일까?


멀리 있지 않다. TV 속에서도 나오고,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회사 옆 동료의 주말 일정만 들어도 보인다. 누군가는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 누군가는 수 백 년간 지속된 인종 편견을 뚫고 성공했고,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20년간 피나는 수련을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회사 동료는 평일 아침엔 수영을 하고, 평일 저녁엔 영어 학원에 가고, 토요일 저녁엔 새로운 기회를 위해 재테크 모임에 참석하고, 일요일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춘천을 다녀왔다고 한다.


'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고 있지?'


남이 한 일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나는 언어의 역할로 인해 의도치 않게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평일 저녁엔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주말엔 더욱더 아무것도 안 하니까 말이다.


의지에 관한 또 하나의 관점은 바로 지적 능력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머리가 좋을수록 좀 더 의지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 인해 좀 더 행복한 삶을 산다. 돈과 성공은 불행을 불러오는 씨앗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행복한 삶의 기초가 되어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두 가지 생각이 합쳐지면 결국 나는 머리가 나빠서 의지가 박약한 것이란 결론이 나오게 된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 머리가 좋지는 않다. 물론 이것도 상대적 표현이다.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우리들 다수가 머리가 나쁜 사람이 된다. 우리도 머리가 좋을 때가 있다. 개나 고양이에 비해서 말이다.


그러면 뭐 의지 부족에 대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우리들 대부분은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꽤나 명확한 현상이다. 단지 이것은 본질이 아닌, 일종의 증상이란 점만 빼고.


우리가 의지가 부족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머리가 나빠서이지만, 그저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해서는 아니다.


사실 의지는 누구도 강한 것이 아니고, 누구도 약한 것이 아니다. 의지는 그저 어떤 단어의 그럴듯한 표현 중 하나이다. 그 원래 단어는 너무도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도 도대체 그 단어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고 살게 된다.


바로 '두려움'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의지는 그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의지가 강하다는 뜻은 두려움이 크다는 뜻이 된다. 처음 들으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진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 있게 뛰는 사람은 바로 화장실이 급한 사람이다. 올림픽 선수도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하게 뛸 수는 없다. 바지에 똥을 싸게 되는 흑역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은 화장실까지 달려가는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발현한다.


아이를 잃을 위기에 처한 엄마의 의지는 설사가 난 사람의 의지를 초월한다.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무런 갈등 없이 포기할 수 있다. 그 누가 자식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의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다르게 표현하면, 그 누가 자식을 잃을 위기에 처한 부모의 두려움보다 더 강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까? 두려움이 클수록 의지는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국 의지가 강해 보이는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렇다. 언뜻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 단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두려움이 큰 것은 아니다. 머리가 좋기 때문에 두려움이 커져 버린 것이다. 그 근본적 원인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 때문이다. 즉, 머리가 좋을수록 자연스럽게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같은 경험을 해도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로 인해 자신에 관한 다양한 미래에 대한 추측이 가능하고, 결국 지금 이 순간 상대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미래에 돈이 없으면 생겨날 일들, 제때 뭔가를 해두지 않으면 생겨날 문제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해두지 못하면 생겨날 갈등들, 늙게 되면 아픈 몸에 대한 추측, 언젠간 일을 하지 못할 시기가 오게 됨을 아는 것, 누구의 말이 사기이고 어떤 말이 제대로 된 정보인지를 판단하는 능력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다 두려움으로 화해서 다가오게 된다.


더해서 머리가 좋을수록 그런 미래에 닥칠 두려움을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가 쉽다. 돈을 잘 벌려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잡아야 하는데 머리가 좋지 않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면 상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쉽고 더해서 주변에서 좋은 반응까지 얻는다.


그러니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두려움을 줄이고, 칭찬도 많이 받는다. 인기도 있어지고 친구를 사귈 때 우월한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우리의 의지박약은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 두려움을 덜 느낀다는 뜻이고, 혹시나 알게 되었더라도 그것에 대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목표도 흐릿한데 목표를 향해 달려갈 힘도 부족하다. 그러니 매일 그냥 막연하게 '잘 되겠지' 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옆에서 머리가 좋은 누군가는 나와는 달리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매일 미친 듯이 뛰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리는 불안해지고 만다. 


불안해지면 갑자기 열심히 달려보려고 할까? 물론 가끔 그런 짓을 한다. 영어학원을 등록하고, 헬스장 회원권을 끊는다. 하지만 결국 손의 쥔 것은 '작심삼일' 이 네 글자이다. 이후엔 같은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도 뭔가에 집중한다. 요즘 시대엔 주로 TV나 유튜브 같은 영상물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


생각을 해봐야 해결 불가능한 두려움만 생기기 때문에 생각 자체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다면 이번 생은 이렇게 마무리할 것인가? 뭐, 그래도 된다. 삶의 의미성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렇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기왕 사는 것이라면 좀 더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아니, 실제로 우리의 착각이었다. 착각이니 해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생각만 바꾸면 된다. 


의지가 매우 긍정적인 삶의 태도일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된다. 의지는 그저 두려움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그리고 열정은 그 두려움을 제대로 대처하고 있을 때 생겨난다. 그러니 우리는 의지나 열정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그저 그것이 그만큼 두렵지 않은 것뿐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가장 두려운 사람이 제일 의지적으로 수영을 배운다. 하지만 물에 빠져 죽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은 우리는 수영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가 정말로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이다.


물론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 적은 가능성을 위해 수영에 인생을 갈아 넣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수영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결국 울릉도까지 헤엄을 쳐서 가는 그런 도전을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방송엔 소개될 수는 있다.


우리가 뭔가 열심히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누군가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의지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들이 나에겐 그리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그저 타인의 두려움이지 내 두려움이 아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의지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순간 나는 졸지에 의지박약이 되고 만다.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덜한 것인데 갑자기 의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표현되고 마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생각보다 많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하다. 그런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는 원인과는 다르다. 우리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 비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불안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 진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그렇다.


타인의 두려움을 의지로 바꿔서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내 두려움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의 진짜 두려움은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답은 단순하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죽음이 우리의 본질적 두려움이다. 하지만 죽음 그 자체로 우리가 불안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진짜 두려움은 바로 매일 하루씩 죽어가는데 오늘 내가 다가오는 죽음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스스로 생각해서 하루를 충분히 제대로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고, 집에 와서도 잘 먹고 잘 자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에 집 청소도 안 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식재료가 쌓여간다. 화장실엔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고, 버려야 할 쓰레기는 점점 늘어간다.


주말이라도 해결해야 하지만 불안하니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운동을 안 하기 때문에 살은 찌고, 살만 찌는 것이 아니라 건강도 점점 나빠지는 느낌이 든다. 매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오늘 딱히 그것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없다.


그러니 불안해진다. 그런데 착각을 해서 타인의 해결책을 바라본다. 그들의 두려움이 사라진 얼굴을 보고는 나도 저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버리면 해결될 일을 영어학원 등록으로 대신한다. 화장실을 청소하면 될 일을 헬스장에 등록한다.


진짜로 두려움을 해결하고 싶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운동하고, 집을 깨끗이 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것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그렇게 살면 남의 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이루려고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서 살아간다. 당연히 삶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산다면 행복하게 사는 편이 좋다. 어렵지도 않다. 꾸준한  운동, 깨끗한 환경, 열심히 일하기, 이 세 개가 해야 할 전부이다.


더 해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찾고, 적은 숫자라도 친구들이 있으면 좋다. 조금만 욕심을 더 내면 지적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독서나 영화 관람 그리고 여행 정도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숲을 걸으며 나누는 담소도 삶에 꽤나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삶이 무겁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들어진 짐을 짊어지고 있어서 그렇다. 그 누구도 그 짐을 지라고 하지 않았다. 타인의 두려움을 가져다가 내 짐으로 짊어진 것이다. 이제는 좀 내려놓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에베레스트에 오를 필요도,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할 필요도,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할 필요도, 많은 경제 지식을 가지고 재테크를 할 필요도, 유튜브에 나오는 다양하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살 필요는 없다.


남 먹는 것 쳐다보고 있을 필요 없다. 대신 주문해 먹던 밥을 나가서 먹는 걸로, 나가서 먹던 밥을 혼자서 해 먹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수많은 남의 사생활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내가 살고 있는 방을 청소하고 오랜만에 화장실 청소를 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보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고 있지 않으면 밀려드는 불안한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그렇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불안함은 남으로부터 온 두려움일 뿐이다.


그렇게 회사 나가기를 싫어하면서 정작 주말이 되면 불안해서 시간을 재빨리 지워버린다. 그래서 월요일이 올 때마다 주말에 뭐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 이런 아이러니한 삶을 이제 좀 멈출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저 나 자신의 두려움만 감당하면 된다. 더해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내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생각과 행동임을 잊지 않으면 된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혹시나 잘 될 때 잘난 척만 안 하면 된다. 안 될 때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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