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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02. 2022

내 것들

소유와 권리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많은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관해서 꽤나 깊은 공감을 하고들 살지만, 살다 보면 도대체 무엇인가를 '갖지 않고' 살 방법은 없어 보인다. 작게는 신발이나 옷 같은 것들부터 크게는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것들도 필요하다. 특히 우리는 인간이라면 꼭 가지고 살아야 할 것들을 따로 정의해서, 그것을 의식주라고 부른다.


삶은 일단 의식주만 해결이 되어도 살만 하다. 문제는 보통 '살만 한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살만한 것만 해도 그 구색을 갖추는 일이 그리 쉽지 않기에 그것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행복하게 살만한 것을 갖추는 일은 꽤나 어렵다.


그나마 운 좋게 살만한 것을 다 갖추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행복하게 살만한 것을 갖추게 되면 우리는 꽤나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문제를 빼고.


도대체 어디까지, 무엇까지, 어느 수준까지 소유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을 다 갖춘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이다.


오랜 시간 월세를 전전하다가 목돈을 모아 전셋집으로 옮겼을 때 나름대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다들 알겠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변화는 매달 월세를 내기 위해서 허덕이다가 이제 조금 숨이 틔여 살만한 정도 수준이지 행복하게 살 수준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이사 후 잠시 몇 달은 통장을 보면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은 소유가 될 때 그나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으로 거듭난다. 단지 문제는 20평짜리 집을 살다가 보면 30평이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30평도 끝이 아니다. 40평, 50평, 60평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20평짜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60평 집을 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30평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좁은" 50평에 살아보지 않았지 않은가?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옷도 그렇고 먹을 것도 그렇다. 도대체 그 끝이 안 보인다. 단지 현재 자신의 경제 상황에서 엄두가 나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포기가 된 것일 뿐 기회만 된다면 한벌에, 한 끼에 수천 만원이나 하는 옷과 음식을 누리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상황이니 다시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눈에 들어온다. 소유에 관한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힘들게 사느니 오히려 소유를 최소화하고 사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자세로 느껴진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다. 오늘 한 끼에 수천 만원을 하는 식사를 한 사람도 한 때는 천 원짜리 초코바에 평생의 기억에 남을만한 인생의 행복을 느꼈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을 테니까.


이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가져다주는 폐해에 관해서는 금껏  많은 말들이 있었고 또한 새기고 살면  좋은 말들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니 내가 거기에다가 어줍잖게 한마디 보태봐야 딱히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책을 읽다가 머리가 좀 띵할만한 글귀를 하나 보았다.


만약 나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와 '삶(생명)'이 두 개로 분리된 것이 되며, 따라서 '나'는 '삶(생명)'을, 내가 상상 속에서 소중하게 소유하고 있는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때 죽음은 겉보기에 하나의 실체가 되고 위협이 된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라는 분이 쓴 책에서 나온 내용이다.


내가 지금껏, 아니 이 세상 사람을 모두가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나의 삶' 이란 말이 가진 의미에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이었다.



보통 '나의'나 영어 'my'는 소유격이라고 한다. 무엇인가가 내 것일 때 쓴다. 내 집, 내 옷, 내 음식. 우리나라에서는 공동체적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나의' 대신 '우리의'를 쓰기도 하지만 본질은 같다. 아무튼 '나의'가 소유격이니 그러니 나의 삶은 (my life)는 문장 그대로 내가 삶을 소유한 것이 된다.


참 당연한 말인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해보니 좀 이상하다. 내가 삶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삶과 동일한 의미인데, 삶이 없다면 나도 없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삶을 소유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이상한 이해는 이후 본격적으로 내가 소유한 것을 잃어버린 상태, 그러니까 삶을 분실한 상태를 '죽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황당한 상황으로 번져간다.


우리는 삶이라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다가, 그것을 잃는 순간을 따로 죽음이라 부르고 있다. 톨레 씨는 이것을 정신분열증이라고 설명해줬다. 듣고 보니 제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어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런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까?


삶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이후 삶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내 집, 내 옷, 내 음식, 내 차, 내 추억, 내 감정, 내 사랑, 내 남자, 내 여자,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 내 글, 내 학벌, 내 취미가 생겨난다. 하지만 내 삶에 대한 소유권이 완벽한 정신분열적 착각이라면 이후 생겨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과연 삶을 소유할 수 있을까?


무소유는 지혜롭고 현명한 삶의 자세지만, 사실 어쩌면 무소유는 너무도 당연해서 딱히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일 수 있다. 흔한 말이지만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죽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소유하지 않고는 살아가긴 힘들 것이다. 삶에 대한 무소유는 그야말로 정신적인 단계가 아예 차원에 도달한 분들이나 받아들이 수 있는 개념일 것이 분명하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듣기엔 좋은 말이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새기고 사는 것은 좋을 듯하다. 도대체 나는 왜 삶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사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삶에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잠시 빌렸다가 반납하고 가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내가 먹는 모든 것들은 입으로 잠시 빌렸다가 항문으로 다시 반납한다. 물론 중간에 머무르는 것들도 있다. 특히 지방이 그렇다! 그럼에도 평생 몸에 쌓은 것들을 죽을 때 완전히 반납하고 끝낸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든 간에 이 우주적 법칙에 의해서 나는 사는 동안 쓴 단 하나의 에너지도 진짜로 소비하지 못하고, 내 몸을 이뤘던 단 하나의 원자도 소멸시키지 못한다. 만약 했다면 나는 그 유명한 '에너지 보존 법칙'을 깬 신적인 존재이고, 스스로 원자력 발전을 해 낸 인간이 되었을 테니까.


사는 동안 살기 위해서 빌린 것들에 대한 '완벽한 반납', 이것은 내 의도나 노력과 상관없이 이뤄진다는 것은 참 다행스럽다. 안 그랬다면 사는 동안 꽤나 긴장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잠시 빌린 것들에 대한 소유욕은 떨칠 수 없다. 전셋집에 살면서 내 집인 듯 구는데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한다. 그렇게 끝없는 소유욕에 빠져든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얻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아주 당연한 것들이 된다.


사실 삶의 모든 비극은 모두 다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빌린 것들을 가졌다고 믿고, 일단 갖게 되면 그것들에 대해 자신이 반드시 가져야 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원래 빌린 것들을 반납을 해야 하기에 조심해서 다룬다. 렌트카를 타본 사람들은 차를 반납할 때마다 면접을 보는 기분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유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고 다뤄도 된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나 버릴 수도 있다. 그나마 소중히 다루는 사람들은 다시 되팔 계획이 있거나, 다시 구하기 힘들거나,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서 지구 환경을 지키고자 하거나, 재구매를 하기엔 비싸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이라면 제대로 반납해야 하기에 조심스럽게 소중히 다룰 것이다. 삶을 소중히 다룬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일이다. 하지만 삶을 소유한 사람들은 삶이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를 엄격하게 질책하거나, 대충 다루거나, 뜬금없이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버리기까지 한다. 소중하게 다뤄도 모자랄 판에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일단 가졌다고 믿는 일은 이후 본격적으로 당연함의 권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런 일을 흔히 본다. 배려를 해주면 그것을 권리로 행사한다. 많은 '상식있는' 사람들은 그런 진상을 보고 비난하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그들 모두도 매일 그런 짓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밥을 해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반찬투정을 한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월급이 적다고 비난을 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하니 성적이 나쁘다고 화를 낸다.


마트에서 돈을 지불하는 순간 손에 쥔 과일과 과자가 내 것이 되고, 내 집 앞까지 오는 택배원들이 배달도 당연한 권리가 된다. 모든 것들이 돈을 지불하는 순간 나의 권리가 된다.


그럼 돈을 냈는데 그것이 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도 되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 권리는 맞다. 그 인정의 주체가 대한민국의 정부라는, 사실상 특정 시점에만 유효한 권리 인정 주체라는 점만 빼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나라를 잃기 전까지는 내 집, 내 택배, 내 과자가 인정될 것이다.


단지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다.


과연 권리가 많은 것이 행복한 삶일까? 그것에 관해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권리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누릴 때 당연하기에 딱히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로 어떤 사정이 생겨서 누리지 못하면 몹시 화가 나게 된다.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벌어 온 돈은 당연히 통장에 들어와야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줄어들게 되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게 된다. 택배를 시켰는데 제 때 제대로 도착하지 않으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비행기를 탔는데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하고,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화가 난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그 수많은 권리들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을까?


만약 그것들에 대한 권리를 빼낼 수 있다면 어떨까? 내 남편이 돈을 벌고, 내 아내가 살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감사한 것이 되고, 택배원이 택배를 배달해주는 것이 돈을 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이라면, 혹시나 그것들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렇게나 화가 날까? 혹은 제대로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사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자신이 '행복할 기회'를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 짓을 도대체 언제까지 하고 살아가야 할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우리가 있다고 믿는 소유와 권리는 과연 우리의 삶이 얼마만큼이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을까? 이래저래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법정스님과 톨레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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