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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Mar 28. 2022

잊혀짐과 버려짐 - 2

히틀러와 아인슈타인

세상엔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일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꼴등이 되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 중에서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듯 보이는 사람들은 바로 일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하다. 100M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려고 할 때 수학 문제를 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일등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명확한 목표를 정해야 한다. 달리기를 잘하려면 힘과 유연성을 최대한 키워야 하지 미적분을 더 잘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목표가 수학자라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꼴등이 되지 않기 위한 사람들도 목표가 있긴 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달성하기가 아주 쉽다. 그러니 목표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반 전체 달리기에서 꼴등만 하지 않길 바란다면 달리기를 하는 그날 운 좋게 친구 하나가 배탈이 나면 된다. 딱히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약간의 운만 따르면 꽤나 쉽게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


삶의 태도를 보면 일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능동적, 적극적이며 에너지 넘쳐 보이고 매우 활동성 있게 행동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반대로 꼴등만 면하면 되는 사람들은 수동적, 소극적이며 무기력하다.


그러니 일등이 되고 싶어 하는 삶이 인기가 많다. 누가 봐도 그게 더 낫지 않은가?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든다.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잠잘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에너지 넘치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단 몇 시간의 시간이 주어져도 딱히 할 것이 없어서 무력하게 그저 시간을 때워버리는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까?


흔히 이런 차이는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의 차이라고들 한다. 아니면 의지와 노력의 차이라고 하기도 한다. 전자는 선천적, 후자는 후천적 차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천적인 것은 해결이 불가능하니 후천적인 의지나 노력에 집중한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다. 이때 운 좋게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기쁨보다는 실패의 좌절을 더 많이 경험한다. 사실 다 성공하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누가 중학교에 들어간 것을 자랑한단 말인가?


이런 좌절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만들어 내고 결국 불행의 근원이 된다. 행복하고 싶어서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는데 받아 든 것은 좌절과 불행이다. 그러니 눈이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시선이다. 그래서 좀 편해지긴 하지만 그것은 그저 수면 아래 숨겨진 것뿐이다. 언제라도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잊힘과 버려짐의 두려움에 관한 진실이다.


잊혀짐은 불이 났을 때 건물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아무도 몰라서 죽을 수 있는 두려움이다. 버려짐은 내가 건물 안에 있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더 중요한 사람들을 구하느라 결국 죽게 되는 두려움이다. 이 둘은 생존이란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중요하다. 혼자 살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남들과 함께 살 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마다 잊혀짐과 버려짐의 두려움 정도에 큰 차이가 난다.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인기가 있는 사람이길 바라고 결국 일등이 되고자 한다. 버려짐에 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은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적어도 꼴등이 되지 않길 바란다. 


남들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으려면 남다른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똑같이 생기고 크기도 고만고만한 펭귄 무리에서 하나를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녀석들과 색이 다르거나 덩치가 크거나 작을 때 우리는 한 녀석을 기억하기가 쉽다. 그러니 잊혀짐에서 독특함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외모, 능력, 성격, 재주, 재능 등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타고난다.


타고나지 못하더라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삶에서 이뤄 낸 성과이다. 어떤 분야이든지 일등이 되면 된다. 학문적 분야라면 노벨상과 같은 상을, 정치적 분야라면 최고 권력자가 되면 된다. 그런 사람이 되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끝에 서 있으면 안 된다. 길게 이동하는 무리 중에서 마지막에 위치할 때 늑대 무리라도 쫓아오면 바로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무리에서는 가장 강한 존재가 무리의 마지막 위치에 서서 이동한다. 그렇게 해야만 무리 전체가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하다.


일등엔 이등 삼등이란 용어가 있지만, 꼴등에는 꼴등밖에 없다. 딱히 표현할 말이 없으니 뒤에서 일등, 이등 식으로 표현한다. 버려짐의 세계에서는 꼴등과 꼴등이 아닌 존재로만 나뉘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소한 꼴등만 안 하면 된다.


잊혀짐과 버려짐 중에서는 버려짐이 좀 더 근원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버려질 수 있는 약자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잊혀짐의 대상이 아닌 버려짐의 대상이었다. 단지 부모님의 커다란 희생으로 우리는 다행히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버려짐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려면 한 명이라도 더 내 뒤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열심히 하다가 보면 문득 내 뒤가 내 앞보다 더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이때 내부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잊혀짐과 버려짐의 자리 바꿈이다.


그때부터는 꼴등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등 자리를 노리는 것으로 바뀐다. 단지 문제는 그 길이 아주 힘들다는 것이다. 꼴등을 벗어나는 것은 단 한 명만 이기면 되는데, 일등이 되는 것은 전체와의 싸움이다. 그러니 매우 힘들다.


운 좋게 일등에 올라서면 다 이뤘으니 자유로울까? 아니다. 그때부터는 또 다른 잊혀짐을 줄이려고 한다. 후세에 잊혀지지 않아야 하기에 그렇다. 


업적으로 남기려고 한다. 최대한 오랫동안 자신이 기억될 인류사적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다. 세계 정복이든, 대단한 학문적 성과이든, 예술적 작품이든, 거대한 무덤이든 아무튼 남겨야 한다.



문제는 이런 결과물들은 너무 크고 강렬해서 도대체 잊혀짐의 두려움으로 만들어 내 것 같지가 않다. 대단한 수준의 노력이며 범접하기 힘든 의지의 산물로 보인다. 결국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 하나만 제대로 바라보면 된다. 그것은 바로 부정적 결과물에 대한 것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히틀러의 결과물들은 과연 얼마큼 대단한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결과물들은 과연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언제나 긍정적 결과물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잊혀짐의 두려움에 쫓겨서 만들어진 결과물들에 대해서 커다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을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인류 전체적으로 부정적 영향인지 긍정적 영향인지 여부만 다를 뿐이다. 아인슈타인 조차 원자폭탄이란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두 사람은 다른 점이 없다. 거기엔 동일하게 잊혀짐의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단지 두려움이 쫓아올 때 히틀러는 어둠의 방향으로 뛰었고, 아인슈타인은 밝음 쪽으로 뛰었다.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버려짐보다는 잊혀짐의 두려움에 쫓기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쫓긴다는' 사실 자체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 운 나쁘게 버려짐의 두려움 속에서 살더라도 그렇게 자신을 비관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자신에 대해 끝없이 실망한다. 그로 인해 내려놓음은커녕 포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포기를 해야 할 때 깔끔하게 할 수 있으면 내려놓음과 그리 다를 바 없다. 그저 미련이 남은 포기가 문제가 된다.


잊혀짐의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의지나 노력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 삶이 그저 내 안에 존재하는 잊혀짐이나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매일 쫓겨가고 있는 과정이란 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어쩌면 삶의 전체 과정 중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진정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 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잊혀짐과 버려짐으로부터 더 이상 쫓기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방식으로 갈 수 있다. 


우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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