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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21. 2021

무한에 관하여(프롤로그)

프롤로그: 소년에서 청년으로

 ㅈ, ㅓ, ㅇ, ㅂ, ㅗ, ㅈ, ㅓ, ㄴ, ㄷ, ㅏ, ㄹ

 이 글자를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아마 머릿속에서 음운들을 합쳐 글자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어가 지칭하고 있는 의미와 연결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읽기를 훈련해온 사람들은 이 과정이 무의식 중에 일어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읽다 보면 어떨까? 이와 유사한 중국의 일화가 있다. 걷는 방법을 바꾸려다 걷는 법을 잃어버린 이야기다. 이미 체화된 과정을 뒤엎어버린 셈이다.

 나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글자가 부서지자 나는 더욱 글자에 집착했다. 처음 겪어본 정신질환이라서 나는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내가 정신질환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냥 피곤해서, 아니면 너무 불안해서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자신을 다독였고, 글을 읽다 보면 점점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정신질환에 관한 공부를 한 후에야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병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병은 강박 장애였고, 그중 글자에 대한 강박 장애 유형이었다. 보통 강박 장애는 뇌의 특정 부위가(전두엽 특히, 피각이나, 꼬리핵 같은 생각과 행동을 연결하는 지점.) 생화학적, 신경학적 불균형을 일으켜 해당 현상을 반복하는 질병이다. 이때 불안감과 두려움을 동반하고, 특정 행위를 반복하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한다. 그러나 행동이 끝나고 나면 뇌의 생화학 불균형은 더욱 심해지고 상황은 악화된다. 마치 탈수 증상이 있는 상태에서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강박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해당 행동을 지속하자, 인격과 자아, 사고 체계에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강박 장애는 더욱 커쳐 새로운 패턴으로 나타났다. 자기 관찰 유형이라는 이름의 강박 장애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의심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나는 해결 방법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서술형 문제를 찍어서 맞췄다고나 할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의식을 글자로 옮겨 적었다. 물론 글씨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적은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눈을 감고 글자를 쓰는 것처럼 글을 적어갔다. 신분이 군인이었기에 운동이나, 훈련 등 몸을 쓰는 일도 병행했다. 점차 강박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군대에 들어온 지 약 8개월쯤 증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뇌의 사고 체계가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첫째, 생각이 너무나 많아졌다. 잠을 자는 시간 말고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 가끔 지칠 정도로 생각이 많다.) 강박 장애의 경우 전두엽의 신경이 너무 활성화되어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런데 이 활성화되는 방향이 한 가지 행위나 한 가지 사고로 표출되기 때문에 기괴하고 섬뜩하게 나타난다. 강박이 거친 후에 내게 남은 것은 활성화에 익숙해진 과열된 뇌였다.

 두 번째, 자아, 자의식이라는 주제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보통 강박 장애를 치유한 사람들은 세밀한 것에 집착하는 성향으로 굳어진다. 나는 특히 자기 객관화에 주목했다. 강박 장애 유형 중 자기 관찰 유형이기도 했고, 인간의 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 언어의 인식에 대한 극적인 변화를 겪었으니, 자아라는 주제에 열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선 첫 번째 변화와도 연관된다. 강박증은 한 가지 행동에 대한 완벽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한 가지 행동에만 집착했던 생각이 확장되어 한 가지 주제나,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이는 높은 성취에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실제 강박증을 가진 사람 중 천재적인 업적을 달성한 이도 많다. 한순간에 갇히느냐, 한 분야에 갇히느냐. 이 차이가 천재와 환자를 가르는 중요 기점이다. 물론 장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강박증을 겪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런 장점을 다 덮어버릴 만큼 강박증은 끔찍한 질병이다.)

 세 번째, 무력함과 상실감에 익숙해지며, 여러 정신질환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실제 강박증을 치유한 사람들은 ‘강박증을 치유했다.’라고 느끼기보다는 ‘강박증을 상실했다.’라고 느낀다고 한다. 정서적 탈진으로 인한 감정의 반동이다. 이를 통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기도 한다. 실제 나 또한 비슷한 현상을 겪었다. 원래의 나는 감정이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좋아지고, 내 감정에 대한 이해력도 높아졌다. 특히, 감정이 소실되고 발생하는 과정을 직접 겪다 보니 상실감과 무력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이상한 경험들을 일반화하고 싶었다. 

 첫 번째, 강박 장애의 자기 관찰 유형은 어떤 행위, 순간에 갇힌 것일까?

 다양한 자기 계발서나, 성장소설을 읽다 보니 깨달은 점이 있다. 사람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자아의 팽창을 겪고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다. 보통 그 시기는 19~20세 정도다. 그럼 대체 왜 이 시기에 일어나는 것일까? 자의식이나 자아의 첫출발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다. 그리고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무의식 중에 판단하고 있던, 그렇기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근거나, 믿음을 들추는 행위다. 점점 똑똑해진다는 것은 이 무의식을 일깨울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이 그 정도의 뇌를 갖추는 시기는 19~20세 정도다. 그리고 결국 뇌 자신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물어본다.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질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었던 자기 관찰의 강박 장애는 인간의 자아 팽창 도중 겪을 수 있는 혼란을 극대화한 자료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고민했던 많은 부분이 제법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인간의 상실감, 무력함은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를 일반화할 수 있을까?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우울증과 신경증은 대체 언제부터 이어져 온 것이며 왜 발생하는 걸까?

 이 우울증은 실존에 대한 공허로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삶에 대한 회의와 의미에 대한 상실(소극적 허무주의) 말이다. 한국이 특히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도, 미국 사회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왜곡된 신념도, 사실 그 뿌리는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발생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심과 정서적 팽창을 종교적, 사회적으로 틀어막았던 것이 곪아 터진 사건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급작스럽게 폭발해버린 사상의 다양성이 서로 격돌한 사건이 2차 세계대전이다. 이 사상의 격돌은 전쟁이라는 형태를 띠지 않을 뿐이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종교라는 이름 아래 통일해 두었다가, 알맞게 변화하지 못한 채 터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급변의 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 발생하는 보편적 도덕, 윤리가 기성세대라는 이유만으로 무너뜨리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밑바닥에는 사실, 상실감과 무력함에 몸부림치는 가련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철학과 수리 논리학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위에 언급한 이 두 가지는 사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고찰은 고대 철학에서 물어왔던 질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1부는 내가 고찰했던 내용들을 두서없이 서술했다.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에 대한 객관화, 자아 성찰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 확신한다.

 2부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내용과 이를 수리 논리학으로 접근한다. 내가 고찰한 내용의 공통점을 비교하고 조금 더 정제된 순서로 나열했다.

 3부는 이를 통합하고 이론화를 했다고 보면 좋은 듯하다. 그렇다고 정답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공식적인 이론이라는 것도 아니다. 또한, 모든 책을 분석하고 비교할 만큼 오래 살아온 사람이 아니니 부족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떤 식으로 가치관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 듯하다.

 4부는 실존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3부에 다다른 독자라면 내가 실존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부터 이어져 온 허무주의가 현대에도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고찰하는 글이다. 만약 실존주의를 느꼈다면, 고전 철학을 정말 많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권할 필요도 없다. 이미 책을 찾아 움직이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는 자신의 내면에 솟구치는 무언가를 스스로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올바른 방법은 내가 겪었던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교훈이나, 설명하는 식으로 전달한다면 이는 또 다른 선입견이 된다. 읽다 보면 참으로 복잡하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의 자아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간단한 단어로 형용하기에는 복잡하다. 그렇기에 이 주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이 조금이나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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