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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22. 2021

무한에 관하여(1부)

part 1. 왜 대답이 다 다를까?

1.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때 적어두었던 공책을 잠시 펼쳐보았다. 그중 가장 섬뜩한 내용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내 머릿속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반복)”


 당시 이 현상에 대해서는 의식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냐 이 문장을 읽고 상당히 이질적이고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당시에는 뇌 속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뿐이었다. 이 이상한 사고에 몰두한 나머지 내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내 생각들을 기괴할 정도로 의심했다. 심지어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의심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의심이 들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책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심지어 진짜 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내용이 정말 책에 적혀있는 내용과 같은지조차 의심했다. 한마디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약 1년이 지난 후, 순간에 갇혀있던 내 뇌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수년간 외부와 단절된 채 갇혀있었던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생각의 시야가 넓어진 내 머리는 팽창의 반동으로 인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나의 생각과는 항상 대조되는, 그리고 비판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마치 2개의 자아가 내 속에 있고, 서로를 곁눈질하는 것처럼. 두 자아는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이 자아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두 자아를 중재할 외부인이 필요했다. 객관적인 진실이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도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 객관적인 진실이 필요하다면서 그런 존재가 있는지, 내가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객관적인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2. 왜 이렇게 다 대답이 다를까?

 의심을 마음속 한편에 밀어 넣은 채, 중재할 외부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밖에 상황은 내 머릿속의 상황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아니, 그 수가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답을 찾으러 왔더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이렇게 다 대답이 다를까?”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속에 밀어 넣었던 의심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찾고 있는 정답은 밖에서 찾을 수 없다.”


 혹시 이 말이 사실인 게 아닐까? 이 대답에 조금 더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만약 객관적인 진실이 있다면, 인간의 자아나, 내면에 어떤 정답이 있다면 통일된 1가지 정답을 향해 가야 할 텐데 말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얘기가 이토록 다르다면, 어쩌면 인간 내면은 모두 다른 답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안의 답 또한 나 혼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대답에 난 간담이 서늘했다. 이래서야 책을 읽지 못했던 때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홀로 찾기 어려운 대답들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기준이 없다는 것은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야 진전이 없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와 상황이 나아진 것이 딱히 없다. 

    

3. 객관성이 아닌 보편성.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흘러갔다. 객관적인 진실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선 논리대로라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내 머릿속에 나온 논리이기 때문에 내가 착각하거나, 논리를 잘못 전개했는지도 모른다. 잠시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1)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하는 경우

 만약 존재하는데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럼 수많은 사람의 결론이 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그 사람들조차 찾지 못하거나, 둘째, 내가 그들의 얘기를 잘못 이해했거나.     

 2) 주관적인 생각만이 존재하는 경우

 만약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모두의 결론이 다 다른 것이라면 앞선 현상이 설명된다. 그러나 무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단 내가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잘못 이해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럼 내 사고 체계에 갇혔다는 얘긴데, 나는 이미 그 경험을 해보았다. 의식에 갇혀있는 이상 스스로 빠져나올 수는 없다. 빠져나와야 한다는 관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매몰되어 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2번으로 가야 했다. 의지할 곳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통계적인 접근이다. 일단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으다 보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을 터다. 그럼 그 보편적인 것과 비교를 하는 것이다. 

     

4.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

 대체 어떤 책을 찾아보아야 할까? 내가 보고 있는,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 관념으로서 옳을 뿐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선을 찾고자 하는 것. 이것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 누군가가 있을까? 있다면 대체 어떤 학문일까?

 나는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객관적, 절대적 무언가를 탐구하는 것. 이는 신에 대한 존재의 물음이지 않을까? 그리고 내면에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 이를 보통 철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곧장 신과 철학에 대한 책을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고민했던 것들은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고민해왔던 주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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