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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23. 2021

무한에 관하여(1부)

part 2. 철학의 시작(1)

<내 생각의 흐름>

Ⅰ. 의심에 대한 고찰.

1. 의심이란 대체 무엇일까?

 책을 읽기에 앞서, 일단 이 의심이라는 관념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규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꼬리표처럼 어떤 인식 위에 자꾸만 덥히는 이 의심을 일단 분석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삼았다.

 의심이란 무엇일까? 의심의 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의심할 어떤 대상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 이후에야 할 수 있는 관념이다. 둘째, 이상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전에 대상을 바르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알고 있으며, 바르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의심을 종결짓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대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있겠다. 또, 우리의 의심에 대한 부분을 확인시키는 방법도 있겠다.

 의심은 대체 어떻게 생겨 걸까? 첫 번째, 무언가를 처음 배울 때 생길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배우며, 타인으로부터 그 대상이, 또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올바르다고 배울 때 생긴다. 상대방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지만, 처음 배우는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납득 하기까지, 혹은 익숙해지기까지 의심이 든다. 이 현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 5~9세 정도,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를 들어서는 아이들이다. 덧셈을 왜 그렇게 하는지, 한글을 왜 이렇게 쓰는지 등등 꼬치꼬치 묻는다. 어른들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숫자나 한글이 아직 머릿속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한글을 왜 그렇게 쓰는가에 대한 물음은 어른들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이미 한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무의식에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덧셈도 마찬가지다. 1+1이 왜 2냐는 물음은 너무나 당연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른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너무 자명하게 옳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용에 대한 격차로 인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이해의 장벽이 생긴다. 이는 대학교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격차다.

 두 번째, 무언가를 오래도록 파고들 때 생길 수 있다. 단순히 반복, 체화하는 것을 넘어, 어떤 주제에 대해 의식적인 고찰을 하다 보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학의 패러다임이나, 수학의 새로운 정의를 발견할 때가 그 예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새로운 신경세포의 연결이 활성화되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뇌를 사용하다 보니, 그 분야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 생겨난 것일 터다.


2. 의심은 왜 생겨나며, 왜 사라질까?

 우리가 어떤 개념을 습득한 후, 우리 머릿속에서 그 개념을 이해하고 납득한 후에는 의심이 종결된다. 그리고 그 개념이 오래도록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이 개념을 사용한다. 언어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보통 모국어에 대한 사용은 너무나 익숙해서 이를 의심하거나, 내가 말을 옳게 했는지 되짚어보지 않는다. 오히려 글을 쓸 때 이 말이 익숙한 말인지를 입에 붙는가 아닌가로 검토하기도 한다. 그러나 2번째 언어를 배울 때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것이다.

 이는 언어뿐만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 수학적 지식, 새로운 정보의 습득에서도 나타난다. 대체 왜 우리 의심은 사라질까? 이는 우리의 뇌가 연역적인 사고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뇌는 항상 최적화를 원한다. 자동화를 원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행동을 무의식으로 처리하도록 전기적 신호를 고착화한다. 여러 습관을 만든다. 모든 행위를 의식하려 한다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배움은 모두 연역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언어, 부모의 교육, 가치관, 생활양식, 문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의심 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배우는 시기는 의심이라는 고차원적 의식이 발달하지 않는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의심이라는 행위는 뇌의 최적화를 거스르는 활동이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를 의식으로 끌고 오는 활동이다. 높은 사고력을 요구한다. 흔히 창의력, 과학적 패러다임이 이 행위에서 출발하는 결과물이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이토록 어렵고, 복잡하고, 불편한 행위를 인간은 왜 하는 걸까?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그것들이 사실임을 밝혀, 더 이상 의심이라는 곤혹적 활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최적화를 위해, 하나의 법칙, 규칙에 전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으로 갖추도록 유전자가 설계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의 믿음을 갈망하는 이유일 수 있다. 의심은 하나의 믿음을 찾고자 하는 행위의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다. 고대에 종교가 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보존되고 있는 보편적 도덕성, 진리, 종교, 과학을 의심하고 또 믿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나의 진실, 하나의 믿음으로 다가가기 위해, 인간은 필히 의심이라는 행위를 해야 하는 셈이다.


3.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의심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이 의심이라는 것은 위의 사실을 다시 전부 의심할 수 있었다. 즉, 어떤 것들을 아무리 옳다고 여겨도 이를 내 인식 안에서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다시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현상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것일까? 일단 이 지나친 회의는 제쳐두자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진행이 안 되니까.     

 정리하면, 우리의 의심은 이미 인식하고 있고, 또 옳다고 생각했던 대상에 이상함을 느낄 때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이상함, 모순을 극복하려는 이유는 어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이제 이 의심의 끝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다가가야 한다는 대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전부 회의할 수 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Ⅱ. 의식에 대한 고찰.

1. 인식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변치 않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인간 내면의 무언가는 어떨까? 인간의 감정이나, 가치관, 생각이 너무나 다양해서 도무지 1가지로 도달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1가지 진리에만 도달하려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수학, 과학이 그 대답이 아닐까?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외부의 대상들을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다. 보통 이를 인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건 정말 가능할까?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 대체 어떤 식으로 관찰한다는 것일까? 우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정말 이 세상의 실체일까?

 잠시 다른 동물들의 눈을 빌려 보자. 어떤 동물은 초음파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어떤 동물은 열 카메라가 촬영해놓은 이미지처럼 세상을 인식한다. 그들이 바라본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세상일까?

 그럼 양자역학의 세계는 어떨까? 우리가 전자를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전자에 입사한 빛이 전자와 부딪혀 반사되고 반사된 빛이 우리의 망막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전자가 부딪힐 때, 전자의 질량이 너무 작아서 받은 빛으로 인해 전자가 이동한다. 즉, 우리가 관찰한 전자는 더 이상 그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전자와 원자로 이루어진다.

 자, 이제 다시 질문해 보자.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정말 외부의 실체일까?

 이처럼 현대 과학 수준까지 넘어오면 경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논리적 접근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추론의 도구가 바로 수학이다. 


2. 감각을 초월할 방법.

 인류는 일찍이 감각의 한계를 인지했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계는 한계를 가지는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대상을 추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상이란 대상의 특정 측면만을 주목하는 것이다. 물리학을 보면, 시간, 질량, 길이라는 물리적 단위로 힘, 부피, 속도와 같은 현실에 관찰되는 대상들을 규명한다. 현실에 대상들의 근간이 되는 기저들을 밝히는 것이다. 이 공통된 기저들을 밝히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그 이유를 간단한 예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글의 자음은 된소리까지 포함해 19개, 모음은 이중모음까지 포함해 21개다. 이 개수는 비교적 적으나, 이들의 조합으로 단어를 만들면 무수히 많아진다. 그리고 각 단어들이 외적 세계에 대응된다. 우리는 이 통일된 대응 관계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다. 이를 표음문자라 한다. 자 그럼 한자는 어떤가? 문자가 단어, 형태소 자체와 대응한다. 그 결과 문자의 개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이를 표어문자라 한다.

 이와 유사하게, 과학에서 물리적 기저 단위로 이루어진 여러 물리적 특징은 기저의 개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화학에서의 화합물이나, 물리의 여러 단위나, 유전자의 개수가 그 예시다.

 이처럼 기저를 분석하는 것이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부분까지 확장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공간이라는 3차원에서 점이라는 0차원과 선이라는 1차원으로의 분석이다. 수학자, 철학자들은 0차원의 점을 먼저 정의하고 3차원인 우리 세계를 분석한 걸까? 그럼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점의 정의를 보자.


 “점이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부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수학자 르장드르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먼저 현실에 포착되는 입체라는 개념에서 입체의 경계가 되는(높이가 없는) 도형인 면이라는 개념이 분석된다. 그리고 면이라는 개념에서 2개의 면이 서로 포개어지지 않고 만나는 도형을 선이라고 정의한다. 즉 폭이 없어진다. 마지막으로 선이라는 개념에서 2개의 선이 포개어지지 않고 만나는 개념을 점이라고 정의한다. 부피도, 넓이도, 길이도 없는 무 차원의 개념이 완성된다.

 위와 같은 과정을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은가? 앞서 언급했던 의심과 유사하다. 우리가 특정 대상을 인식한 이후에야 의심이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점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 3차원의 입체라는 관찰 가능한 대상을 통해 0차원의 점이 정의된다. 우리는 사실 이 0차원이라는 관념에 대해 경험해본 적이 없다. 즉 실제 0차원의 정의로부터 3차원이 분석된 게 아니라, 3차원이라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그 기저를 밝혀 0차원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0차원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다시 3차원이라는 현실이 올바르게 반영되는지를 분석한다. 왜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걸까? 이는 0차원이라는 차원의 기저를 밝혀 0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한 것을 이용해, 관찰 가능한 3차원으로부터 관찰 불가능한 4, 5차원으로의 확장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학적으로 고차원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의식의 기저

 자, 이제 우리는 무턱대고 인식이라는 관념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즉,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의식과 의식의 기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실제 인식론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위해 논리학이라는 방법론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감각에 의한 인식만이 인식의 전부가 아니라, 수학과 같은 이성적인 의식의 기저들을 이용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

 최초로 했던 질문을 환기해보자.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관찰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의식의 기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외부의 실체들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지, 그 인식 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저들을 토대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정교한 탑이 바로 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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