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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T Jun 08. 2024

국가·기업·돈...허구를 믿었을 때 인류사가 시작됐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


4K급 지식으로 푸는 인간의 역사
인류가 지배종이 된 것은 협력 능력
신화가 '하나의 공동체' 상상케 해
'개인'은 국가·자본주의의 산물


"국가, 기업, 돈 등은 우리 모두가 창조해서 신봉하고 있는 집단 환상이다."

그 유명한 유발 노아 하라리 히브리대학교 교수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믿으면서 역사가 시작됐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7만 년 전까지는 지구에 적어도 6개속(屬)의 호모 종이 동시에 살고 있었고. 이중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 '형제 호모종'을 멸종시킨 후 번성했다는 설을 제시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현대의 인류학이 인류를 크로마뇽인부터 시작해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까지 이어져 왔다고 서술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체구가 훨씬 큰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해 다른 호모종과의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들이 집단행동에 특화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합니다. 각각의 개체들이 하나로 힘을 모으게 하는 데는 신화라는 허구가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그는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라고 주장합니다.


현대에도 이는 유효합니다. 가령 자동차 회사 '푸조'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자동차 공장, 유능한 사장과 성실한 직원들,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들, 이들을 합친다고 푸조가 되지는 않습니다. 푸조라는 유한회사 법인이 있다는 인간들의 집단적 환상이 이 푸조를 실재하게 만듭니다. 법인(corporation)의 어원인 라틴어 corpus의 뜻이 몸이라는 아이러니를 그는 지적합니다. 법인이 유일하게 갖지 못하는 게 몸(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평등하다'가 절대 진리일까?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하지만 이를 포함해 300개가량의 판결문으로 이뤄져 있다고 합니다.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릴 경우 은 60세겔을 피해자에게 주는 반면, 여성을 때려 사망케 했을 경우에는 남자의 딸을 죽이도록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봤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함무라비 법전을 '인류 보편성을 담지 못한 구시대의 산물'로 보듯, '보편적 인권'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헌법 등도 현시대의 물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자의 이 표현만큼 더 적확한 지적을 생각해 내긴 어렵네요.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농업혁명은 사기다

저자의 지적은 도발적입니다. 인류 문명의 배경이 된 농업혁명이 사기라니요.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널리 인식되는 것과 달리 초기 농경사회 사람들은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고되게 일하면서도 더 한정된 음식을 먹고, 가축화된 동물들로부터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구가 이미 늘었던 터라 다시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가 (주식인)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국가와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낭만주의의 산물 '여행'

서구 문명의 본질로 이해되고 있는 '개인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흥미롭습니다.

인류의 99%가 농사를 지었던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부속물로만 존재했습니다. 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시대 성에는 귀족 아이를 위한 별도의 방이 없었다고 합니다. 늘 다른 남성 동료들과 함께 지냈는 환경에서 개인이라는 인식은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근대적 국가와 자본주의의 발달이 '개인'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는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부터 개개인을 차출해 내 전쟁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돌려야 하는 자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해외여행의 로망, 이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현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안정된 환경에서 벗어나 온갖 불안 요소들과 마주해야 하니까요. 이는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쌓고 여기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콘셉트를요.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만 돈 쓰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는 낭만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밖의 기억해 둘 것들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근대 이전, 위조는 단순한 사기가 아니었다. 왕의 힘과 특권과 왕 개인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제국의 후예이다(피지배 민족이라도 제국의 언어와 이념을 이용해 현재 사고하고 있다).

-근대 서유럽의 특징은 '우리는 모른다'는 전제하에 제국을 확장하고 과학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빈 공간으로 남겨둔 세계지도가 이를 상징한다.


800쪽이 넘는 이 책은 (그가 지지하는 관점에 따른다면)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으로 등극하기 시작한 7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역사를 다룹니다. 당연히 이 책을 몇 자로 설명할 수는 없지요.

두 가지 감상만 남기겠습니다.


이 책을 3분의 1 정도 읽을 때는 '6가지 호모종이 동시대에 살았고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속 형제들을 멸종시켰다는 내용 말고는 총·균·쇠보다 나은 게 없네?'였습니다. 알고 보니 저자 스스로도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서 영감을 얻고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총·균·쇠를 읽은 터라 '사피엔스'는 좀 식상하다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후 다른 경제사 책을 읽으면서 사피엔스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제가 읽은 경제사 책은 한국의 한 이코노미스트가 쓴 책인데, 실제 경제 현장을 매일 겪어내는 사람이 쓰는 경제사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풀어내는 지식이 너무 흐릿했습니다. 결국 그 책은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사피엔스를 읽은 뒤 해당 책을 읽으니 어떤 영화를 4K 고화질 TV를 보다가 144P 화질 유튜브로 전환해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명불허전, 사피엔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실제 연구 결과나 사례를 제시하면서도 이를 아주 쉽게 풀어쓴 책'으로 다시 평가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유물론적 시각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보이는 것들로 확인된 것들을 통해 인류사를 한 권 책으로 풀어낸 그의 능력은 재러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경이롭습니다.

인류사를 4K급 지식으로 풀어낸 책, '사피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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