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릴 정도로 세계 패권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프랜시스 드레이크(해적 또는 제독)가 지휘한 영국 해군이 승리한 칼레 해전이 하나의 계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코노미스트인 저자는 그로부터 딱 100년 후 있었던 명예혁명(1688년)을 영국의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평가합니다. 제임스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공(윌리엄3세)을 공동 왕으로 추대한 영국 귀족들은 이듬해 "왕이라고 함부로 법을 만들거나 세금을 거둘 생각 말라"라며 권리장전을 들이밀었습니다. 법을 만들거나 세금을 거둘 때는 물론, 상비군을 유지하려 할 때도 의회 승인을 받아야 하게 된 것이죠.
저자는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의 금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대영제국'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합니다.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윌리엄3세는 영국에 들어올 때 수많은 네덜란드 기술자와 금융 인력을 함께 데려 왔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미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만들어 수표와 자동이체 시스템을 시행했을 정도로 금융이 발달된 지역이었습니다. 영국으로 넘어온 네덜란드 출신 금융업자들은 런던의 금융시장이 발달시킵니다. 윌리엄3세 스스로도 1694년 잉글랜드은행의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잉글랜드은행은 정부에 대한 대출을 대가로 화폐 발행권을 부여받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영국의 대외 신인도가 올라가며 영국 국채 이자가 대단히 낮아졌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왕이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상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당장 1671년 찰스2세도 채권에 대한 이자와 원금 지급을 정지시켰습니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채무불이행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과거 10% 혹은 15% 이상 수준이었던 영국의 국채 금리는 명예혁명 이후 1702년에는 6%로 떨어졌고, 1755년에는 2.74%로 내려갑니다.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이 돈으로 영국 해군과 육군을 육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반대편에는 프랑스가있습니다. 프랑스 루이 16세가 재정난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에게도 세금을 거두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 것은 공교롭게도 영국 권리장전으로부터 딱 100년 뒤인 1789년입니다. 이때까지 이 모양이었으니 18세기 프랑스의 재정 운영이 어땠는지 알만합니다. 저자는 "프랑스 왕실은 1559년, 1598년, 1634년, 1648년, 1661년, 1698년, 1714년, 1721년, 1759년, 1770년, 1788년에 채무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이행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합니다.
영국이 저금리로 조달한 재정으로 해군, 육군을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시킨 후 전쟁터에 투입했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전쟁이 시작된 뒤에야 겨우 군사 훈련을 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저자는 이를 비교하며 "프랑스가 16세기 이후 내내 2등 국가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재정전쟁에서의 패배로 볼 수 있다"라고 단언합니다.
스페인이 획득한 아메리카 銀, 네덜란드·중국에 흘러간 까닭
'대영제국 시대'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대항해시대'에도 흥미로운 금융사가 담겨 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 이후 16세기 스페인은 엄청난 금과 은을 획득하게 됩니다. 일단 잉카와 마야 제국에서 귀금속을 약탈했고 1545년에는 볼리비아 포토시 지역에서 대규모 은광을 발견합니다. 이듬해에는 멕시코 사카테카스 지역에서도 은맥을 확인합니다. 때마침 이탈리아에서 수은을 이용해 광물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신기술이 개발됩니다. 당시 포토시 광산에서 한 해 최대 28만kg의 은을 채굴했다고 합니다.
막대한 귀금속을 확보했던 스페인은 어쩌다 영국, 프랑스에 밀려나게 됐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저자는 한 국가에 통화량이 급증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갑작스레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확보한 스페인에서는 통화량이 급증합니다. 20세기 초 이전만 하더라도 금본위제, 은본위제를 시행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스페인은 자국 내 생산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생산 현장에 투입돼야 할 남성들이 전쟁터에 머물렀었기 때문입니다. 통화량은 많은데 자국 내 생산은 이를 받쳐주지 못하지 물가가 오릅니다. 결국 수요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품으로 몰립니다. 이 같은 수요를 충족했던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요, 이 같이 자원이 급격히 유입된 나라가 자원 수출에 대한 부작용으로 장기적으로 경제가 침체되는 현상을 '네덜란드 병'이라고 부릅니다. 1959년 북해에서 대규모 가스전을 발견한 후 네덜란드에 매년 수십억 달러의 천연가스 수출 대금이 유입되면서 네덜란드 화폐 가치가 크게 상승해 이후 네덜란드 수출업체들의 해외 경쟁령을 상실한 데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한때는 같은 현상의 수혜자였던 나라가 이후에는 같은 현상의 피해 국가의 대명사가 된 것이죠.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캐낸 은은 중국(명나라)으로도 흘러갑니다. 명나라는 1560년대부터 새로운 세법 제도인 '일조편법'을 시행합니다. 토지세와 정세(인구세)를 은으로 일괄 납부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농업 생산물이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복잡해진 세제 체제를 간소화한 것입니다.
일조편법 시행에 따라 명나라 내에서는 은화 부족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때 스페인과의 교역을 통해 은을 충당했습니다. 스페인 선대는 멕시코에서 은을 싣고 출발해 필리핀을 거쳐 중국에 가서 도자기, 비단을 은화와 맞바꿨습니다.
스페인이 자국 내 생산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아메리카에서 캐낸 은은 결국 생산능력을 갖춘 네덜란드와 중국으로 흘러가 것입니다.
"미 연준, 세계대공황 때 금본위제 때문에 적정 대응 못해"
20세기 들어서의 저자의 금융사 서술은 좀 더 조심히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근대사는 지금 현재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는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1947년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는 그 명칭에서조차 이견이 분분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저자는 1971년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해 많은 분량에 대해 설명하는데 여기에는 분명 저자의 생각 또는 편향이 많이 반영돼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이 학계나 금융계의 주된 의견과 같더라도 아직은 이견이 분분할 것 같습니다.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긴급 성명을 통해 "금과 달러의 교환을 중지하고 모든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한다"라고 발표합니다. 미국은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에 대응해 1934년 금본위제를 폐지했다가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도입한 지 2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는 44개국이 참여했는데 금 1온스에 대해 35달러로의 교환을 보장하는 대신, 다른 나라는 미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의 교환 비율을 고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발표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이를 '닉슨 쇼크'라고 부릅니다. 패권국 미국이 금과 달러의 교환 비율을 약속함으로 운영됐던 국제 금융 체제는 1971년 이후 사라집니다. 책에서 드러난 바로는 저자는 이 닉슨의 발표를 긍정합니다. 그간 금본위제 때문에 역할이 제한됐던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비로소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저자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금본위제로 인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적기 과감한 정책을 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금본위제는 말 그대로 화폐단위의 가치와 금의 일정량의 가치가 등가관계를 유지하는 제도입니다.
1929년 당시 미국은 최근 6년간 주가가 지나치게 많이 오른 상태였습니다. 당시 미국 주식 시장의 주요 기업 PER(주가수익비율)은 16.3배까지 올랐고, 배당 수익률은 3.48%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2024년 현재 애플이나 엔비디아의 PER이 30배 내외지만 당시와 지금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레버리지 투자가 극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재할인율을 올렸습니다(1928년 2월 3.5%→1929년 8월 6.0%). 레버리지 투자가 많은 상황에서 시장 금리가 오르면 대출 이자율 상승이 투자 수익 악화로 이어집니다. 또 일부 투자자들은 보유 주식을 매각하고 채권으로 갈아탑니다. 당시 금리 인하로 통화량을 늘렸다면 세계대공황은 비교적 빠른 시일에 종료됐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상한 것은 당시 연준이 "버블을 청산하자"는 생각에 경도된 탓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합니다.
이와 함께 금본위제 역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금본위제에서는 국가 간 환율이 고정돼 있는데 이때 한 나라가 금리를 인상하면 자금 유입이 발생합니다. 금리를 내리면 정반대 현상이 나타납니다.
세계대공황 당시 미국 연준은 금리를 인하할 경우 돈(금)이 미국에서 해외로 대량 유출되는 것을 우려해 적극적인 금리 인하 정책을 펴지 못했다고 해석합니다. 저자는 "불황이 출현해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금리를 내리면 더 높은 금리를 찾아 자금이 해외로 유출된다. 금이 해외로 유출되면 시중에 통화량이 줄고 그 결과 중앙은행의 금리인하는 무력화된다"라고 설명합니다.
"한국 외환위기는 고정금리제 유지한 채 자본시장 개방했기 때문"
저자는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그는 IMF위기에 대해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면서 금융자유화(금융 시장 개방)를 추진한 우리 정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고정환율제도는 금본위제처럼 특정 귀금속이나 통화에 대해 교환비율을 통일시킨 제도입니다. 고정환율제도에서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금리 정책을 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자본시장을 개방한 나라가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을 때는 기축통화 국가인 미국 금리에 자국 금리가 종속됩니다. 고정환율제도를 적용한 A국이 금리가 연 1%이고 미국의 금리가 연 3%이면, A국에서 돈을 빌려 미국에 예금하는 것만으로도 금리 2%의 차익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A국에서 미국으로 돈이 흘러갈 것이고, A국 입자에서는 결국 미국 수준으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1997년 한국도 그랬습니다. 국내 외환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달러 가격은 급등함에도, 한국은행은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해 보유 외환을 내달 팔고 자국 통화를 거둬들여야 합니다. 국내 통화 공급이 감소하게 되고 총수요는 더 줄어들면서 생산이 줄고 실업은 늘어나게 됩니다. 저자는 1997년 이후 한국이 자유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면서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국내 경기 변동폭도 줄어들었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저자는 '고정환율제 폐지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27년 세계대공황과 1997년 한국 외환위기 모두 고정환율제에서 상당 부분 원인을 찾습니다. 이 책에는 고정환율제의 폐해만 있을 뿐 미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상당 기간 고정환율제를 유지했던 이유(장점)에 대해서는 짧게만 서술돼 있습니다.
또한 짧은 경제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저자는 '비둘기파'라고 보입니다. 경제위기가 왔을 때는 금리인하 등으로 큰 규모의 통화량을 풀어야 하고, 현재 한국처럼 만성 경상수지 흑자 상황은 소비와 투자가 적다는 것이기 때문에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이코노미스트로서 당연히 금융 현상과 정책에서 대해 특정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읽는 이로서는 반대쪽 입장에서의 주장도 접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매파의 금융정책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둘기파, 변동환율제 옹호자, 확장재정정책론자의 시각에서 세계 금융사를 살펴본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