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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Nov 11. 2022

십 년 만의 치즈 수업

수업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온 건 지난 8월이었다.

국내 유일의 치즈 전문 클래스를 하는 프로마주의 대표 은주로부터였다. 은주와는 서로가 싱글일 때 만나 그때는 상상할 수 없던 아이의 엄마가 된 십년이 넘는 세월의 친구다.

오랜만에 아니 십 년 만의 수업이었지만 나는 겁 없이 하겠다고 했다.

우선 어떤 주제로 수업을 할지 정하고 대략의 카테고리를 정한 뒤 사용될 치즈와 심지어 강사료까지 한 번의 통화로 정리했다.

"그래, 그 정도면 되겠다. 너한테 민폐나 아닐까 몰라. 김 대표님 강의 계획서 정리해서 보낼께“

나는 정말 가볍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난 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던져는 놨는데 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수업을 한다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수업은 10월 가을로 잡혔다.

뜨거운 8월에 가을까지는 한참 남았다. 우선 한 달 동안은 잘 생각해 보고 정 안 되겠으면 9월에 못 하겠다고 하자.

나는 못 하겠다고 말할 때를 정해 놓고 마음은  놓기로 했다.


수업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사용될 치즈들을 미리 구입해 맛을 보기로 했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식품관이 치즈 보유량이 많고 다양해 시장 조사를 다녀왔고 김 대표에게 수업에 사용할 재료 몇 종류를  보내달라고 했다.


십 년 만의 치즈 수업의 타이틀은  "영국의 전통 치즈와 크림" 이었다. 국내에 이렇게 자세히 소개된 적 없는 영국의 전통 체더 Cheddar 그리고 붉은 체더로 잘 못 알려진 레드 레스터 Red Leicester를 수업해 이 치즈들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크림 Cream.

크림으로 무슨 수업을 할까 싶겠지만 영국은 크림이 특별하게 사용되는 나라다. 남부의 콘월 지역과 데본 지역의 자존심 싸움 클로티드 크림 Clotted Cream.

영국식 애프터눈 티에 가장 메인인 크림 티. 스콘에 딸기잼과 함께 올라가 천상의 맛을 내는 클로티드 크림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십여 년 전 클로티드 크림을 만들어 보려 며칠간 실패와 어설픈 성공을 거두며 반복했던 실험을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아랫글은 2014년 클로티드 만들기 실험 과정의 맨 마지막 글입니다.  총 7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aropa7/220116657837


크림의 지방함량률은  이렇게 나뉜다.

영국의 크림 유지방 기준

휘핑크림 유지방 함유율 35%

더블 크림 유지방 함유율 48%

클로티드 크림 유지방 함유율 55%


국내에서 가장 쉽게 구하는 휘핑크림이나 생크림은 지방 함량이 약 35% 내외다.

휘핑크림과 생크림의 차이점은 카라기닌 carrageenin이라는 성분의 첨가로  점성을 높여 휘핑이 오래 유지되게 해 주는 것이다.

 

크림의 지방 함량은 결국 물이 같은 용량에 얼마 인가로 나뉠 것이다.

나는 문제를 거꾸로 풀어 내기로 했다. 크림의 수분을 줄이면 결국 지방 함량이 높아지겠지.


물의 입자는 작고 무겁고, 크림의 입자는 크고 가볍다.

그렇다면 밀도가 높은 면 수건에 크림을 부어 크림 속 물을분리해 보자.

냉장고에서 하면 지방이 굳어 물까지 묶여 있을 테니 지방 굳지 않을 가을의 늦은 밤부터 아침까지 상온에 둬 보기로 했다.

  

빠지는 수분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 크림의 용량을 미리 측정하고 면 수건에 크림을 부어 천천히 오므려 바닥의 면적을 줄여 최대한 무게가 아래로 처지게 했다.

처음엔 입구가 넓은 컵에 올려놓았다가 수분이 빠지며 부피가 줄어들자 입구가 좁고 긴 컵에 올렸다.

새벽녘 즈음 실내 온도가 올라가기 전에 냉장고에 넣었다.

크림에서 빠진 물의 양은 전체 무게 대비 약 15% .

실험에 사용된 페이장브르통의 휘핑크림

측정 이후로도 물은 그릇에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론적으론 가능하나 실제 성공은 불가능해 보였던 실험이 성공했다.

크림 속 수분이 빠지면서 지방 35%의 액체 크림이 밀도가높은 찐득한 크림 덩어리로 변했다.

지방 함량을 측정할 순 없었지만 이 정도의 질감이라면 더블 크림 (지방함량 48%)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실험은 이후로 몇 번 더 진행했고 그러는 사이 수업 날이 다가왔다.

수업에 필요한 치즈와 식재료를 김 대표에게 전달하고 걱정이 넘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연락했다.

악몽을 꾸고, 소화 불량과 불안, 불면증까지 시달리니 정말 수업 날 아침이 되었다.

애들이 아프면 어쩌지, 수업 즈음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어쩌지, 수업 당일 운전하다 접촉사고 나면 어쩌지.

하지만 걱정 했던 모든 일들 중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로마쥬의 스튜디오는 종로구 청운동. 서울의 중심가에 있다. 주말의 광화문은 집회와 시내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오전부터 분주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김대표가 테이블 세팅을 끝내 놓은 모습에 감탄을 하고 스튜디오의 오븐으로 바게트와 스콘 생지를 구운 덕에 버터 향이 공간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는 이상하게도 하나도 떨지 않고 준비해 간 자료를 착착 넘기며 수업을 시작했다.

열네 명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말하다 내용이 길어져 주제를 잃고 정신이 멍해지지 않을까 머릿속의 단어들을 붙잡으려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수업이 예정 시간보다 늘어지지 않게 하려고 초초하게 시간 체크도 했다.


"이로써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으며 인사를 하고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사람들에게 질문도 받고 다른 나라의 치즈들도 이야기하며 수업이 끝난 뒤에도 두 시간을 더 있었다.

치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원 없이 치즈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날씨는 어찌 그리 좋았던지.

벽의 반을 차지하는 창문들 사이로 맑은 햇살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숙성 기간이 다른 체더와 제조 업체가 다른 체더가 사용되었다. 치즈는 자르는 질감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기에 수업을 듣는 분들이 직접 치즈를 자르며 숙성별 치즈마다의 밀도 등을 느끼게 의도했다.

수업 직전에 스튜디오의 오븐으로 바로 구워 내놓은 스콘.

영국 치즈와 크림에 맞게 영국의 사과술 사이더를 마리아쥬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어 프랑스산 시드르로 대체했다. 시드르까지 찾아 세팅해 준 김 대표님 감사해요.

수업 전날 만들어 놓은 수제 더블 크림. 집에서 만든 모양 그대로 아이스박스에 담아 가 수업 전에 꺼내 놓으니 크림의 질감을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


크림에서 물을 빼서 만드는 더블크림으로는 서울우유의 생크림으로도 해 봤는데 이 크림은 입자가 너무 작아서 인지 크림이 면포를 물처럼 빠르게 통과했다. 두 번에 걸친 실험을 해서 굳은 크림을 겨우 얻었는데(전체의 약 30% 정도만 얻을 수 있었다.) 페이장의 휘핑 크림에 비해 거둬 들인 크림의 양이 1/2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러나 입자가 고와서 인지 결과물의 식감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그래서!! 나의 클로티드 크림 만들기는 어떻게 진행 되었느냐면.

수제로 물을 빼서 만든 더블크림을 다시 오븐에 넣어 6시간 정도 약한 온도에 굽는 이 실험의 모습은 이랬다.


수업을 하느라 큰 그릇에 담긴 크림의 사진은 못 찍었지만 어느정도 클롯이 이뤄진 이 수제 클롯티드 크림은 그 풍미가 아주 좋다는 그리고 크림을 굽는다는 신기한 발상이 놀라웠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영국 슈퍼마켓에 가면 흔하게 구입할 수 있는 로다스RODDA'S의 그 크리미한 질감의 클로티드는 얻을 수 없었기에.

 

수강자분께서 책을 들고 오셨다며 사인을 받고 싶다고 했다. 부부로 오셔서 수업도 참여해 주시고 너무 감사했다. 치즈 책이 2007년도에 나왔으니 벌써 십오 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사인을 요청해 오시는 덕에 오랜만에 작가의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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