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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Jan 28. 2024

큰맘 먹고 외출해서 치즈만 보고 왔다.

나는 백화점 치즈 매장에 가면 꼭 참견을 하고 나오더라.

어제는 오랜만에 시가에 갔다.

저녁을 차려야 하는 오후 5시 즈음

나는 서둘러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시어머님께 마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바람 쐬러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저녁은 먹고 오겠다고.

이래도 되나..?라는 불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때가 아니면 혼자 시내 구경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급작스런 외출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단지 저녁을 맛있게 사 먹고 오라는 것뿐이었다.

나의 시가는 동작구 사당동. 이수역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다. 버스를 타고 고작 네 정거장만 가면 강남 고속터미널이 나오는데 나는 이 동네가 아직 신기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쭉- 서울에만 살았지만 우리 집은 저기 북쪽 끝 도봉동이었다. 서울 어디를 가더라도 1시간은 기본이고 강남은 한 시간반이나 걸려야 했다.


어릴 때 가끔 친구 따라 압구정동에 구경 가면 그렇게 낯설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역삼, 선릉 그런 동네도 약속 때문에 갈 일이 있으면 큰맘 먹고 지하철 여행을 해야 했다.

강남역 타워 레코드 혹은 뉴욕제과( 옛날 사람^^)

무역센터 아케이드, 압구정 갤러리아.

내가 생각하는 강남의 랜드마크들에서 약속하면 피로감이 미리부터 밀려오곤 했다. 맞다! 서래마을까지도.


시가에서 신세계강남점은 운동 삼아 걸어갈 수 있고(30분 소요). 서래마을은 마을버스를 타면 10분이고. 방배동 카페 골목의 스타벅스는 남편과 커피를 마시는 곳이 되었다.


시가는 이 동네에서 40년을 넘게 사셨는데 그래선지 나처럼 촌스럽게 ‘강남’ 단어 그런 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동네만 오면 그렇게 마실이 나가고 싶다. 더구나 애 둘을 봐주시니 홀가분하게 어디든 갈 수 있다.


어제 해가 넘어가는 시간에 급하게 외출을 했다.

신나게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겨우 네 정거장만에 신세계백화점에 도착했다.


와!!!!!

고속터미널 상가가 보인다. 사람도 무지 많고 백화점의 외경도 수만 개의 전구로 반짝반짝 휘황찬란했다. 백화점에 들어가니 아! 서울 사람들은 이러고 사는구나.

어쩜 명품 매장들이 저리도 많은지.

점포 개수만 봐도 경기도 우리 동네랑은 달랐다.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유명한 메이크업 회사가 프로모션을 하던데 거기의 직원들도 연예인처럼 혹은 모델처럼 예쁘고 키도 훤칠했다. 나는 이런 보이는 화려한 것에 무지 약한 사람이어서 촌사람처럼 주눅이 든다. 그러한 마음의 테를 안 들키려 너무 화려한 곳은 멀리서 구경만 하고 가까이 가지 않는다.


저층의 명품관들은 지나치고 점퍼가 판매되는 아웃도어 매장만 구경하곤 결국 찾아간 곳은 지하의 치즈 매장이었다.

슈퍼 입구의 오픈 냉장고에는 치즈가 가득이었다.

어떤 손님에게 직원분이 테드드모앙을(Tête de Moine)설명하는 찰나에 내가 도착했고 덕분에 나도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롤(GIROLLE) 로 깎는 이 치즈를 지롤이 없어도 먹을 순 있다고 했다.  마침 매장에는 Boska의 지롤을 함께 판매하고 있었지만 99,000원의 지롤을 갑자기 구입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그리 설명하는 듯했다.

동그란 모양의 치즈들이 모두 까망베르처럼 보이지만 이 중에는 에쁘와스, 테드드모앙, 브레스블루, 랑그르 같은 다양한 치즈가 숨어있다.

나는 치즈 매장에 가면 치즈 설명을 귀동냥하는 편인데 사실 잘못된 설명이 나오면 알려 드려야지 하는 옹졸한 마음이 더 크다.


어제는 지롤 도구 없이 테드드모앙을 먹을 수 있다는 표현에 좀 마음이 쓰였다. 꽃으로 만들어 먹어야 하는 저 치즈를 그저 그렇게 잘라먹는다면 너무너무 아까운 일이다.


내 앞의 손님이 가고 난 뒤 나는 직원분에게

“그렇게 먹기엔 너무 아까워요.”라고 못 참고 말하고 말았다.


참견을 끝내고 치즈 코너를 나와서 와인 매장을 지나는데

또! 치즈 매장이 있었다.

와인 매장 앞이니 간소하게 구성만 맞춰 진열한 것이 아닌 슈퍼코너의 치즈 보다 더 구성이 잘 보이게 커다란 진열장에 있었다.

와!!!!!!

다시 홀린 듯 치즈를 구경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직원분과 치즈에 관해 담소를 나눴다.

와인 매장 앞의 치즈 코너라 그런지 와인 담당직원처럼 정장을 입고 근무하셨다.

슈퍼 치즈 코너는 앞치마를 착용하고 일하시던데  말이다.

그곳의 치즈 직원분은 파베 블루(Blue Affinois Pavé)를 권하셨다.

그냥 파베 다피누아(Pavé d'Affinois) 보다 블루의 풍미가 좋다고, 분명 브리 같은 소프트 치즈를 입에 넣었는데 끝맛에 블루치즈의 향이 퍼진다고.

그분은 향이 퍼진다고 할 때 손을 넓게 펴며 말씀하셨다.

진짜 표현 속에 향이 퍼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 게랑드 소금이 들어간 페이장브르통(Paysan Breton)의 버터를 찾는 손님이 와서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녁을 차려야 하는 시간에 호기롭게 시어머님댁을 나선 지 겨우 1시간. 더 이상 할 게 없어 식품 매장을 한 바퀴 더 돌아보고 붐비는 카페는 접근도 못 해보고 그대로 집으로 가는

4212번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 내려 슈퍼에서 뻥튀기와 바나나 우유를 사들고 집에 들어오니 겨우 6시 반, 저녁 식사가 벌써 끝났단다.

밖에서 놀고 온 나에게 형님이 뜨끈하게 떡국을 끓여 주셨다. 애 둘 엄마에게 이런 게 진짜 호사다.


그런데 나는 겨우 치즈만 보고 돌아오다니.

주말 저녁의 강남 한 복판을 신나게 돌아다닐 생각이었건만.

그래도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혼자의 저녁공기가 자유롭게 시원했으니 말이다.

그럼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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