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치즈 밖에 모르는 답답이야. FROM 톨레도
그래, 나도 이럴 줄 알았다. 쉽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40kg이나 되는 짐을 끌고 이 시골까지 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대책 없이 무조건 온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이 작은 마을의 숙소도 알아 두었고 묵고 있는
호스텔에서 업소 주인과 통화도 해 주었다.
그래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물론, 치즈 만드는 농장과 연락도 해 두었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은 치즈 하고는 전혀 무관했고 낡아빠진 숙소는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전화는 어떻게 받은 건지.. 근처에 작은 호텔이 보여 찾아갔으나 에구, 휴점이란다.
동네 사람들은 일요일 대낮에 지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는 낯선 동양인을 아예 대 놓고 빤히
바라봤으며 나는 어설프게 "올~라" 하고 웃었지만 40kg의 짐 무게에 눌린 억지웃음이었다.
스페인은 시골의 작은 마을까지 놀랍도록 버스노선이 잘 되어있다고 했다.
그건 정말이다. 내가 찾아간 마을은 기껏 10분만 걸어도 마을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작아도 버스가
주기적으로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버스에서 내리고부터다. 나는 어디든 걸어서 찾아가야 했고 마을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은커녕 지나가는 강아지도 볼 수 없는 적막 그 자체다.
그렇게 한적한 마을을 돌고 또 도는 동안 무언가 무서움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 와서 툭, 하고 치더라도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설마 그럴까. 하는 헛된 우려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험함이었다.
그날, 결국 나는 그 한적한 버스 터미널에서 4시간을 기다려 원래 머물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숙소의 직원은 어떻게 다시 왔느냐고 반겼고 나는 거의 넋이 빠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I'm back home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니 그제야 열 시간이나 헤매느라 나가버린 정신이 돌아왔다. 컴퓨터를 들고 호스텔 옆 식당으로 들어가 주문한 저녁이 나올 때까지 구글 지도를 축소, 확대해 가며 종일 헤맨 동네와 원래 내가 가고 싶었던 동네를 찾아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이렇게 가는 거였는데, 그러니까 원래 내 일정대로 가야 하는 것이었어, 아니 아니 그래도 한 번 이렇게 헤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좋은 경험이었잖아? 거리도 멀지 않았어 단지 버스 노선이 주말이라 몇 개 없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이야”
내 탓이오 하는 후회와 그래도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위로를 하는 사이 닭고기와 구운 피망, 양파를 넣어 만든 따뜻한 햄버거에 막 튀겨낸 감자가 쟁반에 담겨 나왔다. 종일 굶은 터라 숨도 안 쉬고 먹을 줄 알았는데 너무 지쳤는지 햄버거 보단 따뜻한 물만 마시고 있었다. 32도의 날씨에 말이다. 거기에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다녀온 mora라는 마을에 간 건 만체고치즈 때문이었다.
만체고(Manchego)는 양젖으로 만드는 스페인 대표 치즈로 돈키호테로 유명한 -카스티야 라 만차- 주가 주 생산지다. 카스티야 라 만차 주의 주도인 톨레도(Toledo)를 만체고 치즈를 찾는 첫 베이스캠프로 삼아 근처의 치즈 마을을 버스로 찾아다니기로 한 것이었고 mora는 톨레도에서 겨우 30km 떨어진 가까운 마을이었다. 마침 머물던 호스텔 앞의 식품점에서 우여곡절 끝에 만체고 만드는 거래처를 연결시켜 준 것이었는데 톨레도에서 닷새를 머무는 동안 가장 최고의 식품점이어서 아저씨의 말만 믿고 그 작은 마을을 찾아갔다가 그렇게 헤매고 온 것이었다.
어쨌든 다음날 아침은 월요일이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은 황량한 일요일을 벗어난 화창한 월요일이었다.
“데카트론 가는 방법 좀 알려줄 수 있어?”
점심 즈음 느긋하게 짐을 챙겨 호스텔 데스크로 내려가 가야 할 대형 상점의 위치를 물었다. 데카트론은 캠핑전문 대형 마트로 캠핑을 하지 않더라도 여행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구할 수 있는데 나에게 필요한 건 휴대용 가스와 조리도구였다. 음식을 해 먹어야 마음이 위로되는 나로선 조리를 못 하는 숙박시설은 너무도 답답한 공간이었기에 필히 몰래라도 음식을 해 먹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슈퍼에서도 이소가스를 쉽게 살 수 있지만 유럽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휴대용 가스를 판다. 데카트론은 그걸 유일하게 파는 장소로 스페인 전역에 몇 개 없는 그러니까 차가 없으면 갈 수도 없는 장소에 있는 곳을 드디어 여행 2주일 만에 찾아간 것이었다. 고작 10분 버스를 타고 말이다.
2인용 코펠세트, 450g 이소가스, 손으로 돌려 충전하는 랜턴 등을 사들고 금의환향 호스텔로 돌아왔다. 이제 모든 게 준비 됐다. 원래 내가 찾아둔 만체고 치즈 마을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신나게 사들고 온 장비들을 차곡차곡 넣고 떠날 준비를 하려니 호스텔직원 알라인이 찌뿌둥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민희, 난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알라인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네가 이젠 정말 떠나잖아 너는 닷새나 이 호스텔에 머물렀다고”
“아하하하! 알라인 나 좋아하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는 걸. 내가 단지 닷새나 톨레도에 머물러서 서운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덩치가 좋고 꽤 잘 생긴 얼굴에 매너까지 두루 갖춘 알라인은 그간 나에게 스페인어를 영어로 번역해 주는 좋은 통역관이었고 동네를 잘 설명해 주는 투어리스트 오피스였고 늦은 밤 타파스 가게에서 만났을 땐 가게 주인에게 “내 친구야 음식 잘 챙겨줘”라는 부탁을 해주는 동양적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민희, 여길 떠나면 다음 일정은 어떻게 돼? 네 일정이 궁금해”
“만체고 치즈 마을을 몇 곳 더 들렀다가 7월 초엔 영국으로 넘어갈 거야. 런던 남동쪽으로 체다치즈 마을이 있거든”
“치즈, 치즈, 치즈, 넌 어떻게 계속 치즈 이야기뿐이니?”
“난 치즈를 보러 왔거든. 가을에 올리브와 하몽을 보러 다시 스페인으로 내려올 거야 그때 가능하면 톨레도에 다시 올게”
치즈 밖에 모르는 나를 서운해하는 알라인을 다독인 후 그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호스텔을 나와 톨레도 남쪽 70km 지점의 콘수에그라(Consuegra)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괴물로 알고 싸웠다는 그 유명한 마을 콘수에그라로 이제야 정말 만체고치즈를 보러 간다.
이제 보니 나의 치즈에 관한 무모함은 돈키호테 만큼이나 심각했다.
2013.06.10 스페인 톨레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