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례의 아이히만> 그리고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두 번째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대해 정리할 생각을 못했다. 단순한 '악의 평범성'으로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남아있는 듯 했고, 과연 책 하나로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내가 잘 이해했는지 두려웠으며,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글을 쓴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 숭고한 철학적 사유가 혹시나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나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며 철학적 업적 속에서 '한나 아렌트'를 조금씩 발굴해 내는 작업도 병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야 미천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나의 생각이 더 확장되거나 깊어지는 경험을 했다기 보다는, 우연히 보게된 tv를 통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면서 마음 속 글쓰기 욕구의 트리거가 당겨졌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말은 책의 부제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에도 있듯이 '악의 평범성'일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아이히만의 재판 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으로 무장하고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죄인에게서 일반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성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눈 앞의 일에만 매달린, 요즘으로 말하면 일반 직장인과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고 자각하는 것에 경악한다. 그러한 태도를 보며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 자각이 없는 경우 죄의식 없이 어떠한 범죄도 저지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이더라도 가까운 주변에서 만큼은 훌륭한 가장으로서 친구로서 존재하지만 그의 행동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할 때 사회적 범죄자=누구에게나 나쁜 사람이라는 구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폭력사건과 테러리즘, 최근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선택한 러시아처럼 자행되는 많은 범죄들이 '악의 평범성'에서 보듯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 곁에 와 있는지 모른다. 악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상호간의 시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우리는 악인으로서, 혹은 악인으로부터 나와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상황에 던져질지 모른다. 그것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도 모른채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깊은 사유를 피하고 단편적인 사실, 믿고 싶은 것들만 받아들이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현대의 세계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아이히만' 한 사람만 단죄 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히틀러 정권이 권력을 잡고, 유대인을 섬멸의 대상으로 정하여 실행 단계에 옮기기까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닌 국민 총선거에 의해 당선되었고, 정책으로 유대인의 척결을 공언하였으며 많은 독일인이 그를 지지했다. 그런 국가적 상황에서 아이히만은 국민의 지지 아래 공무원으로의 복무를 했을 뿐이며, 소위 업무 효율을 위해 자발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단계까지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렇게 본다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서야 하는 사람은 '아이히만' 한 사람 만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처벌의 대상에 대한 법 집행은 범죄 행위의 구체성과 분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현대 법체계의 한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나치를 선택하고 악을 집행하는데 있어 그를 지지한 독일인 전체가 범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가능하게 되는데, 이런 대상의 확장은 부제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을 '악의 평범함'이 아닌, '악의 일상성' 또는 '악의 진부함'으로 읽게 되었을 경우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강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독일인 전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느끼고 희생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어떠한 의도에서이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인류 공동의 가치가 휘손될 때, 그를 선택한 국민 전체가 죄인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책임'은 느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죄와 책임'의 범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거가 왜 권리가 아닌 '의무'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IkITdRIAqs&list=RDCMUC78PMQprrZTbU0IlMDsYZPw&index=3
재외국민이 되어 처음으로 투표한 대선이 끝났다. 한국에서 떨어져 있어 생생한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지만, 뉴스에서 들려오는 많은 소식들은 먼 이국 땅에서도 선거에 관심을 두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당연히 '권리'를 행사했다. 이번 처럼 온갖 의혹과 비방이 난무한 선거가 있을까 할 정도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 많았지만, 한 사람의 선택이 죄와 책임의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사유의 범위를 총동원 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소속원인 이상 가져야 하는 책임감. 나를 위한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인류를 위한 공동의 가치를 구현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국가적인 범죄를 저지를 일이야 없겠지만, 내부적으로 누군가를 편가르고 허울좋은 말로 국민을 기만하며,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력을 방조한다면, 그 리더를 선택한 유권자 모두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전에 스스로 그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적 사유는 이렇게 우리 일상 속에 자리잡으며 선거에 대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책임의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