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Office 1화] 구직을 위해 서울에 올라간 부산사람
많은 청년들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취업하여 지내기를 원하지만,
너무도 부족하고 열악한 일자리에
연고도 없는 서울로 떠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1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 고향인 부산의 채용공고를 살펴보면
신입 연봉은 약속이나 한 듯이 1,800만 원~2,000만 원 수준이었고
이마저의 일자리도 많지 않을뿐더러
업무의 비전 역시 암울한 상황이었다.
취업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매일 채용공고를 뒤적이는 것이 일과였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늦잠을 자며, 시간만 허비하는 백수 아들이
영 못마땅하고 한심하게 보이셨을 것이다.
늦잠을 자고 있으면 창 밖으로 어린이들을 태우러 온 어린이집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구직활동을 하다가 다시 낮잠을 자고 있다 보면 다시 하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 나도 모르게 '너희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구나'라는 혼잣말이 나왔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불편한 마음을 안은채 시간은 흘러
어느새 12월의 겨울.
수중에 남은 돈이 단돈 100만 원이 되었을 때에서야,
그동안 고민하고 망설였던 서울살이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작은 캐리어 하나에 최소한의 옷가지와
정장 한 벌, 구두, 노트북을 챙겼고.....
숟가락, 젓가락 한쌍에
외롭고 고단한 서울살이를 달래어줄
소주잔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 곳도, 직장도 구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무모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나 싶기도 한데....
나의 계획은 심플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직장이 주로 많은 곳으로
출퇴근이 용이한 2호선 신림역으로 가서
고시원을 구한다.
무조건 최단시간에 취업을 목표로,
시간이 지체될 경우엔
아르바이트를 먼저 시작 후,
취업활동을 병행한다.
아버지께 서울로 올라가서 취직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조금 놀라시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해보려나 보다 하고
보이셨는지 별다른 반대는 없으셨다.
그렇게 난 흰 눈이 펑펑 내리던
12월의 겨울,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에 도착해선 차가운 서울의 추위도 낯설었지만,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암호 해독하듯이
몇 번이나 살펴보고서야 신림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신림역에 도착해서 2~3곳의 고시원을
실물로 영접했을 때의 충격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TV에서만 보고
그저 고시원의 좁은 방을 상상했는데,
막상 실물로 그 자태를 영접하고 나니......
오늘 밤 단 하루도 여기서 자고 싶지 않단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감옥의 독방과 비슷한 크기(1평~2평)인 고시원은,
몇 가지 옵션에 따라서 또다시 난이도가 달라지게 되는데......
당시의 입주조건은 이러했다.
가장 기본인 침대만 있는 방은 20만 원 초반~후반대.
만약, 방에 자그마한 창문이 달려있다면 5만 원이 더 비싸다.
아, 물론.... 창문은 실제로 열리지 않는 내창이라
그저 밖이 보이는 역할만 한다.
침대 옆에 작은 책상까지 함께 있는 방은 30만 원 중후반대.
물론, 화장실과 주방은 공용공간을 함께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시원의 펜트하우스급인
침대, 책상에 개인 화장실까지 함께 있는 방은?
오래된 고시원엔 이런 방은 있지도 않고,
원룸텔, 리빙텔이란 이름의 신축건물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가격은 당시에 40만 원 후반 대였고,
현재는 보다 쾌적해진 시설에 60만 원 초, 중반대로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비록 내가 수중에 가진 돈은 100만 원이 전부였지만
공용공간에서 씻고 화장실 이용을
줄 서서 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월세 48만 원인 펜트하우스급 고시원 방을
서울살이의 첫 보금자리로 계약했다.
스스로를 몰아넣고, 배수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서울의 첫날밤.
불안하면서도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되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