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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Feb 28. 2023

사랑보다 깊은 욕망, 다시 말해 정치

김영민,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를 읽고


김영민 교수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을 통해 알게 된, 명쾌한 글을 쓰는 분이었다. ‘명쾌하다’의 사전적 정의만큼이나 그의 글은 명백하고 시원한 동시에 명랑하고 쾌활했다. 공부와 죽음 같은 평범한 주제를 새롭게 정의내리고 유머를 가미하면서 어느새 독자를 심도 깊은 대화의 장으로 초대한다. 이번 책은 관심도 별로 없고 껄끄러운 주제인 정치라는데, 그의 논조라면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정치 뉴스나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는데, 과연 정치란 회피한다고 외면할 수 있는 일일까? 책의 제목인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라는 문장 속에 답이 있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율해 나가자면 필수적인 과정이 정치라는 말이다. 피할 수 없다면 어떤 입장과 태도로 대해야 할까.



정치를 논하기에 앞서 저자는 ‘인간으로 사는 일’ 즉 ‘삶’부터 정의해 나간다. 그는 삶의 본질이 고단함이기에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고 그렇기에 타인의 삶을 쉽사리 판단하지 않는 것을 예의라고 하였다. 더불어 삶이 쉽지 않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욕망과 무기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고, 두 번째는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이 모순들 사이에서 매 순간 균형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기를 선택했고, 그렇다면 어렵지만 똑바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권력 혐오는 곧 삶을 혐오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권력에서 멀어진다면 아름다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책임하고 권태로운 일이라고 일갈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최근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삶이란 무엇인지, 왜 이토록 허약하고 허망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이는 고비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내 힘으로 답을 찾아내야 하는 평생의 수수께끼다. 지금껏 겪은 바로는 고비가 아닌 상황이어야만 타인의 정의를 눈여겨 볼 수 있다. 그 정의들을 꼭꼭 씹어서 소화한 뒤에야 위급한 순간에 내 것으로 꺼내볼 수 있었다. 내게 삶이란 ‘의미를 찾고 잃어버리는 것의 반복’이며 ‘권태와 긴장 사이의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다. 내 속에 쌓아둔 이런 개념과 원칙이 없다면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권태로움에 지치고 긴장에 녹아내릴 때 버틸 수가 없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읽기에 주력하고 드라마에 몰입했다. 이제는 이야기의 단골 주제였던 ‘사랑’보다 '욕망과 정치’가 더 자주 다뤄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비밀의 숲〉과 〈작은 아씨들〉은 욕망과 권력과 정치로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절정이었고 〈비밀의 숲〉에는 김영민 작가가 '권력을 냉소할 수 있는 것도 권력'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권력의 최고점에 서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 tvN


비유적이고 우회적이어서 정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문학도 사실은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여행할 권리》를 읽으며 실감하기도 했다. 김연수 작가는 이 책에서 문학의 언어와 주제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정치성에 대해 언급했고, 문학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 김연수, 《여행할 권리》 중에서




부당하게 직장에서 내쫓기거나 가족이 억울한 사고를 당했다면? 공동주택에서 협의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 모두가 정치 안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회적 약자들이 내는 연대의 목소리를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치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모욕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에 대해 정치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모욕이라는 것을 김영민 작가의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정치가 어디 있냐고? 탄생과 합의, 규제와 권력, 빈부격차, 개혁과 설득과 토론과 논리, 수사학과 배움, 노동과 환경, 자연재해와 전염병까지 우리의 삶 외부의 길처럼, 내부의 모세혈관처럼 존재하는 것, 그것이 모두 정치다.


철학적 질문에 웃음기를 머금은 김영민식 유머에 설득당했고, 정치의 부정적인 이미지에만 매몰되어 그 속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불가피하게 해야 된다면 비난과 외면보다는 관심으로, 적대보다는 이해로써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이상 정치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배움이었다.




책 정보 :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김영민 글, 어크로스 펴냄

Cover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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