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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Dec 26. 2022

견고한 틀 대신 느슨한 그물망으로 엮은 삶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산뜻한 초록 바탕 위에 자전거 탄 사람을 그린 일러스트가 그려진 가뿐한 판형의 책. 최근에야 친숙해진 ‘해방’이라는 단어의 시원한 감각과 그 앞에 붙은 ‘아버지’라는 어렵고도 묵직한 단어. 여기에 ‘미스터리 같은 한 남자가 헤쳐온 역사의 격랑’이라는 소개글은 전연 어울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결의 책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좋다’는 입소문으로 기대감이 실린 책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첫 문장을 보고 《이방인》이 떠올랐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자 다른 작품을 생각할 여지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듯했다. 검색으로 알게 된 것은 작가가 이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써 왔으며 1991년에 《빨치산의 딸》이 이적표현물로 압수되어 10년 간 출간이 금지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긴 시련의 세월에도 그가 쓰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 이토록 따스하고 감동 가득한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격스러웠다.



화자의 아버지는 작전상 변절한 빨치산 출신으로, 오랜 감옥살이 뒤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적성에 안 맞는 농사뿐이었다. 빨갱이 딱지로 인해 집안 사람들의 앞길을 막은 처지에 남들 일에 오지랖까지 넓은 아버지라니, 가족들의 원망과 울화 은근히 깊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경에서 사상과 이념으로 점철된 부모의 삶을 지켜보며 화자는 무덤덤하고 관조적인 인물로 자란 것으로 묘사된다.


누군가는 잘 죽었다며 시원해할지도 모를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예상과는 다르게 장례식장은 북적댔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사람들 덕에 딸은 몰랐던 아버지의 넓은 인맥과 따스한 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가족만큼 끈끈한 사이임을 자처하며 일을 도맡는 사람들, 한 번 오고 자꾸 또 오는 사람들은 넓고 깊었던 아버지의 사람됨과 진면목을 조목조목 증명했다.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아버지는 유물론에 입각하여 존재를 대우하고 관계를 중시했으며 노력으로 이루는 진보를 믿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이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으나 타자에 대해서는 이념과 세대, 껄끄러운 관계까지도 제쳐두고 오직 사람으로만 대하며 어려운 이웃들의 오죽한 사정을 일일이 들여다본 아버지였다. 그 ‘오죽’이 얼마만큼인지 알고 싶지 않았던 화자도 결국은 알게 되었다. 유물론자의 논리대로 먼지로 돌아간 아버지였건만 그 삶이 남긴 흔적들이 햇빛을 받은 먼지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찬란하게 부유하고 있음을.


오지랖을 못마땅해할 때마다 아버지가 내세웠던 ‘민중’과 ‘사회주의’는 어머니의 불만을 입막음하는 강력한 논리이자 무기였다. 에피소드마다 펼쳐지는 부모님의 실랑이 안에 삶의 철학과 해학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해학’의 사전적 정의는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이다. 정의 그대로 그의 삶은 익살과 품위를 잃은 적이 없었으며 그 생애가 자아낸, 손과 손을 맞잡아 생긴 느슨하지만 촘촘한 ‘그물망’은 남겨진 가족들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었다.



이 관대하고 위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프레임과 인식에 대해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빨치산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과격한 공산주의자라고 어렴풋이 인식했을 뿐이다. 찾아보니 이 단어는 프랑스어 또는 이탈리아어 파르티잔(parti + zan)에서 나온 용어로 당원, 즉 사상가라는 뜻이 된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시절에이념을 지키려고 행동했던 사람들이다. 나처럼 무지하고 무심한 사람들이 있기에 색깔론은 여전히 먹히는 것인가 보다.


생각의 틀을 고정하면 인식은 단순하고 편리해진다. 그러나 그런 틀이 타자를 규정하고 배척하여 관계를 단절하기에 결국은 자신을 외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만든 그 틀을 넘으면 편협한 이해도, 위태로운 관계도, 좁은 세상도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알려주었다. 이념에 너그럽지 못했던 나는 부끄러움이 차올라 몽글한 이 이야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책 정보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글, 창비 펴냄

Photo : pixabay.com & @espec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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