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흐름’에서 펴낸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두 개의 낱말을 주제로 한 에세이집으로, 뒤의 낱말을 다음 작가에게 넘겨준다. 《시와 산책》은 그래서 《산책과 연애》, 《연애와 술》, 《술과 농담》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중 두 권을 접한 뒤로 이 시리즈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낱말에 얽힌 다른 경험과 정서가 개성 있는 문체를 통해 배어 나온 모양이 다채로웠고 무엇보다 그 연결성이 좋았다.
나에게 글로 쓰고 싶은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고양이와 기타〉일 것인데, 이미 관련 글을 써오고 있으니 누구가 이 단어를 넘겨받아서 나와는 다른 어떤 세상을 펼쳐 보일지 궁금하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인연을 이어가기도 한다. 고양이와 기타, 기타와 피아노, 피아노와 핸드크림, 핸드크림과 케이크, 케이크와 그림책처럼 하나의 관심사로 맺어져서 그가 알고 있는 또 다른 관심사로 확장되며 관계가 도타워지는 것이다.
한정원 작가는 산책을 하며 시를 떠올리고 사색을 즐겼다. 시를 품고 걸으면 걸음도 잔잔해지고 시선도 따뜻해지고 사유를 길어 올리기도 가뿐한 건지,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섬세했다. 그가 인용한 글처럼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마음이 시"라는 것을 그의 문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계절을 감각하고 생명을 관찰하며 오가는 사람들의 말을 수집하였다.
아픔이 많은 환자들을 보듬고 이해하려는 정성도, 길고양이의 끼니를 챙기고 이웃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마음도 넉넉하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산책을 한동안 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발목 통증에게마저 그는 온화했다. 오랜 기간 고생했으면서도 “그러고도 지금까지 남은 미미한 통증은, 그 끈기를 봐서라도 몸에 머무르게 해 줘야지 어쩌겠”느냐며 받아들인다.
그런 그가 냉정해지는 건 떠도는 소문을 대할 때다. 그는 사실에 회의적이고 진실에도 어쩌면 유보적이다. "한 인생 전체의 현실조차 바로 그 인간의 가장 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슈니츨러의 문장과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 안 그러면 다들 눈이 멀지도”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문장을 빌려온 것을 보면.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외로움의 가능성’이라는 표현에 어찌나 공감되고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라는 문장에 얼마나 흔들렸는지. 그는 시를 품고 되새기며 훈훈해진 마음을 홀로 간직하기보다는 손 내밀어 맞잡는 이다. 그와 같은 온기 어린 용기가 서로에게 의지(依支)하게 하고 살아갈 의지(意志)를 채워주기도 한다.겨울과 가난, 나이듦과 병듦, 어둠과 퇴색을 말하면서도 아름다움이 시들지 않고 우아함을 유지하는 그의 문장들을 보면서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자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작이 “같이 걸어요”라는 말이라면 좋겠다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도 어떤 이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와 같이 한 걸음 내디뎌보면 어떻겠냐고, 같이라면 조금 헤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그러자 묻기도 전에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 의지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