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고 교육되어야 할 학교라는 공간에서부터 부조리와 권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다룬 세 편의 이야기를 읽었다. ‘성장이란 단어보다 생존이란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십대들’이라는 소개글처럼 그들은 성장은커녕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공의 지름길 쪽으로 진입하지 못한 아이들은 생존에까지 위협을 느낀다.
첫 번째는 실업 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다. 화자는 어릴 때부터 함께하던 친구들과 취업과 진학이라는 선택 앞에서 엇갈리고, 음식을 시키는 사람과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그가 느낀 삶의 격차는 주로 일요일의 풍경에서 드러나곤 했다. 여름휴가 때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과는 달리 그의 부모님은 일요일에 함께 쉴 수 없었으며, 이제는 자신의 일요일마저 빼앗긴 상태다.
친구들은 미성년자 실습생이 혼자 일하다 죽은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고, 화자는 자신이 그런 입장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그들과 너무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 죽음을 죽은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마는 심경은 어땠을까. 그런 그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그는 그저 일을 하고 싶었고, 일한 만큼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었다. 왜 겁에 질려 있는지를 자문하던 그가 찾아낸 답이 ‘내가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게 절망적이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세상의 부조리에 민감한 ‘지형’이 등장한다. 그는 이야기의 이면을 상상하거나 틈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유한 문자를 만들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줄 아는 친구였다. 그런 지형이 안정된 미래를 위한 공부에 떠밀리는 동안 주변에서는 또래들이 죽어갔다.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어떤 어른들은 진짜 무책임하고 어떤 청소년은 죽는다.
지형의 보호자는 사라진 지형을 두고 ‘그럴 애가 아니’라고 거듭 말한다. 단정하는 건 어른들의 습관이다. ‘이런 애’와 ‘저런 애’, ‘이렇게 태어난 애’와 ‘저렇게 죽을 애’를 빠른 판단으로 가른다. 지형이 사라진 건 그런 어른들이 지겨워서였고, 그들을 닮아가는 자신이 두려웠으며 그렇지 않은 친구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서였던 것은 아닐까.
세 번째는 학교 폭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학교 재단 집안이라는 권력을 가진 친구와 저항 없이 괴롭힘을 참아내는 친구, 그리고 이를 견딜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려는 화자. 천진난만한 동생의 눈에 비친 세상과는 너무도 다르게,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라고는 학교도 사회와 다르지 않게 권력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사실이었다.
세 이야기 모두 학교에서부터 삶의 격차와 권력과 폭력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고민에 어른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른이라는 말은 청소년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 믿을 수 없는 부류, 아이들을 보호할 방법도 모르면서 권리만 가지고 있는 존재들. 또는 작가가 생각했던 것처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그런 존재인 것일까.
첫 번째 이야기에서 친구들이 부모님의 기대대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중이라면, 화자의 삶은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공부 중독》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엄기호 작가는 요즘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삶을 ‘식민화’하고 ‘질식’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알기에 청소년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에서처럼 학교를 떠나는 것이리라.
청소년들에게는 안전하게 성장하고 안정적으로 삶을 계획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른이라면 '세상은 좋아졌는데 요즘 아이들은 쉬운 일만 찾는다' 같은 기성세대의 시각을 고집하는 대신 적어도 그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일은 그들이 성장을 하기도 전에 생존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하나의 목표를 위한 획일적인 교육이 아닌,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과정이 아닌,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