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Oct 20. 2023

좋은 이야기란 씨앗과 같은 것

발터 벤야민이 칭송한 헤로도토스의 이야기 방식


작가이자 평론가, 그리고 미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를 몹시 애정했나 보다. 벤야민의 저서를 읽지는 못했지만 철학자나 비평가들의 글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마주쳤다. 벤야민이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니콜라이 레스코프 같은 작가들을 일찌감치 좋아했다고.


벤야민은 특히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 속 글을 보고 그야말로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치켜세웠다고 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신형철 평론가의 강연과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리고 한병철 작가의 『서사의 위기』를 통해서 총 세 번 접했는데 매번 흥미로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6세기, 이집트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패전한 왕 사메니투스에게 개선 행진을 지켜보도록 모욕을 주었다. 딸은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지나가고, 아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이 광경을 보고 모든 이집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사메니투스는 고개만 숙일뿐이었다. 그런데 끌려가는 늙은 포로가 자신의 하인임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슬퍼했다.



사메니투스는 왜 늙은 하인을 보고서야 무너졌을까?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아함을 자아내어 그 이유를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갖는다. 이에 벤야민은 부연 설명을 하지 않은 헤로도토스를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한병철 작가는 이 예시를 들면서, “서사는 설명을 자제한다”라고 말했다. “설명은 서사적 긴장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벤야민의 말도 함께 인용한다. 설명은 서사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으로, 이야기가 품고 있는 지혜와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고 말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야기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논할 때도 이 글을 내보인다고 했다. 좋은 이야기는 설명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넘긴다. 그리하여 각자의 경험과 사유로 또 다른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생산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의 해석도 함께 들고 왔다. 몽테뉴는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곧 무너질 판이었다”라고 했단다. 이를 보고 벤야민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인들과 함께 토론을 했다고 하는데, 저마다의 의견 또한 재미있다.


벤야민의 친구 프란츠 헤셀은 “가족들의 운명은 곧 왕의 운명이기에 동요하지 않았지만, 하인이 처한 상황은 뜻밖이며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흔들린 것”이라고 보았다. 벤야민의 연인 아샤 리치스는 “실제 삶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지만 무대 위에서는 감동인 것이 많다”는 말로 대신했다고.



벤야민 자신은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온다”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온 사람이 덤덤하게 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현관에 놓인 낡은 신발을 보고 통곡하는 상황 같은 것이라고 신형철 평론가는 덧붙였다.


이는 마치 피라미드 안에 밀폐된 채
수천 년 동안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발아력이 보전된 씨앗과도 같다.
- 발터 벤야민 -


좋은 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의 해석을 부추긴다. 글을 쓸 때에도 자신만의 인식을 생산해내야 한다고 신형철 님께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래서 해보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왕의 운명이란 언제고 칼날이 들이닥칠 수 있으며, 나라와 권위와 가족마저 잃을 수도 있다 것을 그는 알았다. 허나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마저 빼앗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실감 때문에 무너졌다고 해석해 본다. 프란츠 헤셀의 해석과 유사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해보자.


왕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엄을 지켜야 한다. 장희빈을 제외하고는 폐위된 왕비가 사약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장면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왕이나 공주가 지위를 잃어도, 왕자가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권위도 지위도 없었던, 잃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하인이 유일한 자유를 빼앗긴 장면을 마주하고 왕은 도저히 위엄을 지킬 수가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의 존재론과 노후대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