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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건축가 Nov 15. 2022

함께.. 걷는 것

엄마의 여든 생신을 보내며 -

  우리 엄마는 참 이상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엄마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늘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남들에게 나를 엉뚱하게 설명하고, 내 어깨를 무겁게 했다. 



  나는 첫째 딸이다. 친가에서는 오빠 네 명이 나고 첫 딸이라 기쁨으로 반겼고 외가에선 외동딸의 손주라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엄마에게 나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첫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엄마는 돌도 안된 나를 업고 다니는 것이 힘들다고 혼자 재우고 자주 시장에 갔고, 어느 날 일찍 깬 내가 기어서 다니다가 철재 책상 아래 모서리에 눈 가장자리를 찍어서 피를 흥건히 흘린 일이 있었단다. 워낙 울지도 않던 아기가 울어서 이웃 분이 들여다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소아마비 접종 시기를 놓쳐서 열병으로 어려운 시간을 넘겨야 했고... 또 엄마는 둘째 낳는다고 두 돌도 안된 나를 친정에 맡기고 한참을 찾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까 내가 엄마 자신을 '언니'라고 불렀다고 신나게 깔깔 웃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나쁜 엄마는 아니었다. 뭐든 좋은 것을 골라 주셨고 예쁘게 가꿔주셨고 나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냥 엄마는 유복한 집에 오빠 둘 아래 막내딸로 자라나서 어리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사람이었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오랫동안 유지하여도 별문제 없이 잘 지내오셨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올 가을, 여든 살이 되셨다. 물론 엄마도 이후 긴 세월 동안 우리를 키우시면서 어려운 풍파를 피하실 수는 없었고 많이 노쇠하셨다. 엄마는 우리 아들을 포함하여 손주들을 다 조금씩 봐주셨던 터라 아이들은 할머니와 다들 친숙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일반 할머니와는 조금 결이 다르게 기억한다. 티격태격 할머니!...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모두 아들들이라 별나기도 했겠지만 할머니는 다 좋게 봐주시지는 않고 야단도 치시고 애들과 실랑이도 하셔서 푸근한 할머니는 아니고 짓궂은 형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 시간 지나서, 요즘 다 자란 손주들은 자신들과 에피소드 많은 할머니를 유독 귀여워(?)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엄마를 잘 이해 못 했다. 요즘 말하는 MBTI로 보면 I와 E의 관계였던 것이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엄마의 요구와 희망 사항들이 내게 벅차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 말이니까 무조건 해야 되는 줄 알고 힘껏 따랐던 것 같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조금씩 속상함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외견상으론 멀쩡하지만 긴 대화를 잘 않는 모녀지간으로 살아왔다. 


  엄마의 여든 생신은 우선, 가족들끼리 간단한 축하행사를 기본으로 딸들과의 여행, 엄마 친구들끼리의 식사, 축하금, 맞춤형 선물 등으로 의논되었다. 모든 행사는 두 달여 동안 하나씩 여러 사람들의 축복 속에 잘 치러졌다. 축하 행사에서 낭독할 편지를 두고 쑥스럽다고 서로 미루다가 아들의 '엄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라는 벼랑 끝 권유로 결국 내가 했다. 그 편지를 쓰며 어린 시절 집안 어르신들께 때마다 편지를 쓰게 했던 엄마 생각이 났다. 마지막 과정이 여행인데.. 엄마의 컨디션 걱정이 된다고 해서 여동생과 함께 경주로 여행을 갔다. 경주는 엄마 고향이 있는 곳이다. 나는 친교를 즐기시는 엄마가 여러 친척집들을 방문하실 것으로 예상했다. 기억도 안 나는 친척들을 또 만나러 다녀야 하는 압박감과 긴장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번만 참아야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우리와 함께 하는 작은 시간 시간을 조용히 즐기셨고, 최근 꼭 위로가 필요한 외숙모님댁만을 잠시 방문하셨다. 여행하는 동안 엄마는 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함께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계셨고, 엄마를 어린 딸 다루듯이 순간순간 보필하는 여동생을 보면서 내가 효도 빚을 많이 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한 효도를 세고 있었는데... 엄마는 천성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하고 계셨고 여동생은 언니의 부족함을 메우며 엄마의 여든 생신의 가을까지 와 있었다. 예쁜 단풍을 보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만 모르고...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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