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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담 Jun 16. 2016

천박한 그 단어, 나는 ‘존나’ 쓰기 싫었다

맞춤범들에게 고함

“소담 씨, 안녕하새요. 00이한테 소개받은 000입니다.^^”


문자를 보자마자 주선자에게 전활 걸었다. 그 남자와 만나지 않겠노라고. 이유가 뭐냐고 묻기에 대답했다. ‘안녕하세요’의 ‘세’를 ‘새됐다’ 할 때 ‘새’로 써서 보냈더라고. 겨우 그런 걸로 만나보기도 전에 거절이냐는 면박이 곧장 돌아온다.


겨우 그런 거? 언어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약속한 ‘코드’다. ET와 소통할 때야 손가락 하나와 따스한 마음만 있으면 될는지 모르지만 같은 땅에 살면서 다른 기호를 쓰는 이와 대체 어떤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링컨은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성인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쓰는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틀린 맞춤법들을 모아놓은 게시물이 인터넷 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일해라 절해라’ 한다는 둥 ‘죄인은 오랄을 받으라’는 둥 차마 웃지 못할 사례들이 많았다. 그런데 무책임한 언어생활이 갖는 문제는 단지 기본 맞춤법을 상습적으로 틀리는 ‘맞춤범’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 나 자신과 했던 굳은 약속이 하나 있다. ‘존나’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욕지거리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지만, 쌍시옷이 들어가는 육두문자는 쓰고 싶은 충동도 그다지 없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존나’ 없이는 문장 구성이 어려운 또래 친구들과의 학창 시절 그 복판을 지나며 ‘존나’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은 나 자신과의 전쟁 그 자체였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욕을 하고 싶은 충동이 아니다. 나 혼자 ‘존나’를 쓰지 않는다는 소외감, 날 괴롭힌 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뭐든지 존나 그렇다고 말해야 진실돼 보였다. ‘정말’ 멋있다고 하면 거짓말 같고 ‘무척’ 짜증 난다고 하면 왠지 찌질해 보이던 때, ‘존나’라는 그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없던 나는 정말이지  외로웠다.


지나고 나니 저속한 두 글자를 뱉기 위해 입을 한 번 오므렸다 벌렸다 하지 않았던 과거가 퍽 대견하기까지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으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비슷한 조류 속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는 조금 착잡한 맘이 되곤 한다. 비속어에 대한 게 아니고 남들이 쓰면 그저 따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 십 대들 같은 세태에 대한 얘기다.


천송이가 어마무시하다면 나도 따라 어마무시하고 누가 완전 멋지다면 그냥 완전 멋진 거다. '어마무시’도 ‘완전히-’ 뒤에 따라붙는 형용사도 모두 정체불명의 어법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니면 일단은 ‘트렌드’를 따라가고 보는 게 요즘의 ‘트렌드’인 것일까.


SNS를 하다 보면 초등학생 시절 그 어느 지점쯤에 들어와 있는 듯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꿀잼’이라고 안 하면 나의 흥미를 말 못 하고 ‘노잼’이라고 안 하면 나의 무심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그렇다. ‘레알’ 그렇다고 해야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줄 듯이 언제나 ‘레알’ 절박한 이들도 보인다. 짱짱맨이고 개이득이고 케미가 갑이고 어린아이들이 그러면 그래 너 사춘기구나 귀엽게라도 봐주겠지만 다 큰 성인이 그러고 있으면 어딘가 얼치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유행어도 비속어도 무조건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유행어는 트렌드의 날카로운 반영인 경우가 많아 흥미롭고, 비속어는 정말이지 그 말이 아니고서는 내 울분을 도저히 표현 못하는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성인이라면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언어생활에 임했으면 좋겠다.


말과 글에는 그 사람만의 향이 있다고들 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그대로 그 사람의 빛깔이랄지 매력이 된다는 얘기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 내 손끝에서 빚어지는 문장은 부디 내 스스로 돌보고 가꾸자. 향기 없는 꽃이 될지언정 악취를 풍겨서야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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