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담 Mar 17. 2016

성별을 잊는 연습

나를 억압하는 건 누구인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때때로 남자라는 착각이 든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수록 성별이라는 정보가 덜 중요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어른이 될수록 완숙한 여인이 되어가는 것인 줄,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여성스러움’에서 하루하루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성별은 마치 고향과도 같다.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변하지 않는 그 엄연한 사실은 특별히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거니와, 수시로 떠올려야 할 필요도 없는 일인 것이다.



Man and Woman, Edvard Munch



삶의 모습이 성별에 의해 달라지고 같은 성별 내에서는 비슷한 삶의 양식을 공유하던 과거에는 ‘성별을 잊은 삶’이란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었을 테다. 남자는 ‘남자의 삶’이라고 정해진 길로 가야 하고 여자는 ‘여자의 삶’이라고 정해진 그 길로만 가야 했으니까. 그러나 크게 ‘바깥일’과 ‘집안일’로 구분되던 남녀의 역할은 허물어졌고, 더 이상 바깥일에서 자유로운 여성도 집안일에서 자유로운 남성도 없다.


생각해보면,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여자’로서 혹은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성애자로서 연애 상대를 구할 때 외에는 어쩌면 별로 쓸 일이 없는 것이 성별 아닐까.


그런데도 남자 대 여자 구도의 전쟁은 끊일 줄을 모르니, 언제나 그렇듯 촌스런 사람들이 문제다!  


성별은 나를 타인과 구분 짓는, 그러니까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저 차원의 조건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나 남자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며 나를 타인과 구분 짓는 여러 조건들을 점차 획득하게 되고 성별이란 건 자연스럽게 덜 중요한 정보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 들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한 사람들만이 끝까지 성별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Designed by MINA



성별을 차별의 근거로 삼던 - 그리고 주로 여성이 그 차별의 대상이 되던 - 시대가 워낙 길었으니, 성별에 대한 구시대적 인식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구시대적인 관념에 반발하느라 도리어 성별이라는 조건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별로 인해 겪는 불편함은 타인의 선입관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인터넷 등지에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 군상이 많이 서식하고 있지만 현실의 온도는 다르다는 것이다.


남자다움의 정반대 편에 서서 ‘남자다움’을 연기하고 있는 사이비 마초들의 열등감, 개인적 피해의식을 구조의 철학으로 포장하는 조금 이상한 페미니즘, 0세에 획득한 성별 정보를 여전히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말끝마다 '여자는-' '남자는-'을 붙여버리고 마는 미욱한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이들에게 분노할 시간에 필요한 건 나로 살아가는 연습이다. 여자 OOO, 남자 OOO가 아닌 그냥 '나'인 채로 살아가는 연.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닌,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세계에는 이미 아주 많이 있다. 그들이 덜 분노하는 이유는, 감수성이 낮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뻥치시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