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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담 Aug 13. 2016

엄마에게 보내는 글

- 연해주에서 -

언제부터일까. 나는 '우리 엄마'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라는 표현이 꼭 '우리'를 의미하는 게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을지라도, 나의 엄마는 결코 '우리 엄마'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어떤 의미를 갖는다.


지난 해에 '여성주의를 주의하라'는 글을 썼을 때, 난 적잖이 놀랐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내 글대해 드러낸 거친 분노,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이 아닌, "여성으로서 겪은 억압이 1도 없었다"는 한 문장을 향해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을 분노하게 하고자 쓴 글이 아니었기에, 그 날 이후 오랜 성찰과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내가 여성으로서 억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쓸 생각이지만, 어쨌든 '1도 없는 억압'의 가장 밑바닥에는 내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나를 여자로 키우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키웠다. 물론 엄마도 어디 별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고,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는 그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엄마의 교육 방침에도 적당히 깔려 있었으나, 사회가 가져온 여성에 대한 억압된 인식이 엄마를 통해 내게 재주입 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소위 '여자 혼자 살기 어려운' 이 풍진 세상을 쭉 '여자 혼자의 몸'으로 살았던 엄마는, 도통 여자라서 어려운 게 없는 사람 같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나가서 돈을 벌었고, 밤이면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담배를 태웠고, 기댈 남자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 엄마는 여자라는 이름 뒤에 숨는 법이 없었다.


스물 두 살 즈음인가, 내가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엄마에게 뺨을 맞았었다. 그러나 "왜 술은 되고 담배는 안되는데?" 바락바락 되받아쳤을 때, 엄마는 이내 그것이 '딸내미가 담배피우는 건 어쩐지 쫌 그렇다'는 자신의 편견에서 기인한 것임을 인정해주었다. 요컨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게 지금 말이냐 방구냐는 식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 역시 으레 가지고 있던 편견들에 내가 전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을 때, 엄마는 몹시 괴로워했으나, 뒤돌아서 그녀 혼자 생각해주었다. 그리고 아닌 건 아님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던 언젠가, 내가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얻고 드디어 엄마의 짐이 조금 가벼워질까 싶었던 즈음, 엄마는 암진단을 받았다.


몸이 불편해 병원을 찾은 지 1주일 만에 대학병원에 입원했고, 열 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거쳐 몇 개월 간의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수술은 그나마 견딜만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항암치료로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닥쳐왔고, 그럼에도 엄마는 기어이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야 말았다.


다 늙은 엄마가 몸의 장기를 거의 절반쯤 떼어내고도 털고 일어났는데 어린 딸년이 쓰러져 있어서야 되겠냐는 그 신파적 마음가짐은, 내가 수렁에 빠졌을 때마다 매우 놀라우리만치 힘을 발휘하며 먹혀들곤 한다.


좀 지랄맞긴 해도 늘 적당히 모범생이었던 딸이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고,  기들을 거침없이 떠들게 되자 난 엄마가 조금 걱정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딸로서의 정소담이 아닌 쓰는 인간으로서의 정소담을 받아들인지 오래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며 더 야하게 쓸 것을 요구했다. 늘 내가 조금 더 촌스럽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도 되었다.


금발 벽안의 외국인을 만나 느닷없는 열병에 빠졌을 때도, 내가 내 마음을 가장 먼저 털어놓은 대상은 엄마였다. 바다건너 유럽에 살고 있는 그 남자가 도통 잊히지 않는다는 내 말에, "왜 연애하지 않구?" 하는 질문으로 도리어 태연히 답한 것도 엄마였다. 외국인과의 연애는 어쩐지 두렵다는 내 말에, 왜 그리 촌스러워? 일갈을 던진 것도 엄마였다.


몇 년 전인가. 어딘가에서 주최한 편지쓰기 대회에서 어떤 여대생이 '길거리의 거지를 보고는 동정했지만 어머니 당신에 대해서는 무심했다'는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나 역시 그 글을 읽고 가슴을 쳤으나,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손해보는 장사를 일삼는 것에 내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 말도 안되는 공식을 늘 확인시켜준 엄마여서 고맙다. 철저히 너와 나로 이분되는 세상에서, 변함없는 예외가 되어주며 '너는 곧 나'임을 확인시켜준 엄마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세상에 조건없는 사랑 없다지만, '니가 내 딸'이라는 사실 외에는 정말 아무 조건도 필요없다는 듯이 내 모든 지랄을 받아주고 사랑을 퍼부어주고 언제까지고 등돌리지 않는다는 약속를 보여주는, 그리고 그 사실에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대상. 나에겐 그게 엄마였다.


사실 이런 글을 쓰면 둘도 없는 모녀관계로 비추어지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십년 간 이어진 엄마와의 갈등은 이루말할 수 없이 커, 내내 나를 괴롭혔다. 올해가 되어서야 모든 게 다 좋아졌다. 역시 나중에 따로 쓰겠지만,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니 대부분 해결되더라! 하하.


실컷 잘난체만 하고 돌아다니고 그간 변변히 돈벌이를 못했었다. 그러다 올해 드디어 내가 이십대에 목표했던 연봉을 달성했는데, 얼마 전 엄마에게 생전 처음으로 생활비를 건네니 '여자 혼자의 몸으로도 도통 어려운 게 없어보였던' 엄마는 그제야 퐁퐁 눈물을 쏟았다. 일이 좋았고 커리우먼으로 사는 게 즐거웠지만, 자신이 나가서 벌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대 일을 관두어선 안된다는 부담감이 지난 세월 내내 너무 무거웠다고, 엄마는 거의 30년만에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어떻게 30년 가까이 그런 내색을 전혀 안했을까 싶은 마음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것조차 미리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이었다.


엄마는 참 미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미모는 나에게 열등감을 안긴 일이 많았다. 엄마의 형제인 삼촌들은 나를 보며 넌 니 엄마 미모를 못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기 일쑤였으며, 십대 때조차 엄마랑 둘이 다니면 사람들은 엄마의 미모를 칭찬하고 그래서 따님도 예쁜가봐요, 하고 덧붙였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이게 반전이 됐는지, 이제는 사람들이 날더러 예쁘다고 칭찬하고, 엄마더러 어머니도 젊으셨을 때 미인이셨겠어요, 그렇게 덧붙인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화가 끓어오른다. 서글픈 마음 감출 길이 없다. '셨겠어요'라니, 엄마는 어느새 미모를 과거형으로 칭찬받아야 할 만큼 나이든 걸까. 내 눈에는 십여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엄마의 주름이 다른 이들이게는 보이는 걸까. 그 생각을 하면 하루저녁쯤은 맘이 아리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센티해지는 걸 경계하며 남은 인생 신나게 즐기다 가기로 했으니,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어떻게든 가는 세월 막아줘야지 뭐. 그게 우리 모두 즐거운 거 아니겠어?(그치, 엄마?)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다. 비루한 글을 선물이라고 줄 셈은 아니고, 서울로 돌아가면 용돈을 두둑히 건낼 셈이다. 이런 걸 써주면 엄마가 울어버리고 말 것임을 알기에, 이 글을 보고 눈물바다가 됐을 때쯤 청승 떨지 말라고 외치며 선물과 봉투를 안기려는 계획을 나는 이미 다 세워놓았다.


엄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화에서 나를 '정소담'이라고 3인칭으로 칭하는 독특한 화법을 썼다. 생일 카드를 써줘도 메시지에 내 이름 석자를 꼭 포함시켰고, 뭐랄까 "넌 그냥 정소담이야" 라는 묘한 외침이 있는 화법을 썼다. 문자를 보내도 뜬금없이 정소담 화이팅! 우리 화이팅! 이런 식이었는데, 그리하여 나는 누가 뭐래도 그냥 정소담인 나로 자랐고, 그렇게 해준 김경희라는 사람에 대해 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김경희 화이팅, 우리 화이팅이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 세상에 잘 태어났어요, 내 엄마 당신. 선물을 가득 안고 곧 돌아갑니다. 총총!





2016. 8. 13.


이국 땅에서 엄마 딸 정소담이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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