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일, 정동진 까칠한 갈매기의 기록
새 집에 이사 온 이후 가장 성대한 청소를, 지난 31일에 했다. 신발장을 락스로 닦았더니 집에서 폴폴 나는 수영장 냄새는 상쾌하고 참 좋았다. 자정을 기다려 꿍꿍이와 카운트다운을 하고, 채비를 해 집을 나섰다. 정동진 行.
4시쯤 강원도에 도착해 휴게소 우동을 먹고 두 시간쯤 졸다가 뜨는 해를 보는 게 내 계획이었는데, 전 국민이 해돋이를 보러 정동진에 몰려온다는 사실을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모르고 있었다. 정동진 앞바다를 5km 남겨두자, 1시간에 1km도 채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이내 그 동녘의 땅은 무질서의 아수라가 되었다.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하는 차량들, 여기저기 울리는 경적소리, 창문을 내리고 고함치는 사람들, 차도에 차를 버리고 해를 보러 떠나버린 사람들...
너무 까칠해지진 말자고 되새겼던 나의 새해 다짐은 첫날의 태양이 뜨기도 전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불편함은 이내 기막힘으로 바뀌어 나는 그 광경에 껄껄 웃어버렸고, 꿍꿍이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역주행을 해서 보는 해돋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우주 저 너머에 꼭 삼백예순다섯 개의 태양이 있어 이를테면 섣달그믐 같은 날에만 뜨는 크고 아름다운 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실상 태양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의미는 새해 첫 해가 뜨는 것을 기어이 보고야 말겠다는 나와 당신의 그 곧고 정한 마음가짐에 있다.
그러니 정동진에 갔다가 인파로 인해 뜨는 해를 설사 놓쳤다 할지라도, 그건 그리 슬퍼할 일이 못된다.
에잇, 밤새고 와서 해도 못 봤네, 하며 식구들끼리 눈을 맞추며 한바탕 웃고 말면 그뿐. 해를 보고 온 일이야 곧 흔적도 없이 뇌리에서 잊히겠지만(어차피 연말이 되면 해돋이를 보러 정동진에 갔던 게 올해의 일인지 지난해의 일인지도 가물해진다) 정동진까지 갔다가 해를 보지 못한 일은 해마다 떠오를 테니, 가족끼리 공유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늘어나 오히려 더 좋은 일이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올 해에는 좀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으로 부지런을 떨며 그곳까지 갔으면, 우리의 각오는 정말이지 그걸로 됐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천에 맨날 뜨는 똑같은 그놈의 해를 보겠다고, 새해 벽두부터 질서를 어기고 양심을 속이고 민폐를 끼치고 얼굴을 붉히고. 일출을 본들 그런 당신들의 새해가 퍽이나 아름답겠느냐는 말을 속으로 내뱉으면서, 착한 마음으로 경건한 새해를 보내기로 한 나의 다짐은 역시 동해 앞바다의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새치기를 해서라도 나는 꼭 뜨는 해를 보아야 해.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을 제치고서라도 우리 가족은 해돋이를 봐야만 해. 얼굴을 내놓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이기적인 꼴을 저지를 수 있으니 저렇게들 당당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이르자, 동 트기 전의 새까만 강원도보다 내 마음이 더 깜깜해졌다.
새해 첫날이니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글을 써보리라 결심했지만, 나는 결국 잔뜩 비꼬는 말을 다음 문장에 쓰고야 말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그리도 욕하는,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최모씨인지 하는 그 여자의 마음은, 어쩌면 당신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결국 정동진의 가장 높은 땅에 닿는 데 실패한 나는, 정동진역 기찻길 옆에서 거진 다 뜬 해를 보는데 만족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인파 속에 섞이지 않고 멀리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좋았다. 손을 호호 불며 해님을 기다리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까칠해졌던 마음이 이내 풀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종이가 꼬리에 불꽃을 단 채 하늘로 날아오르고, 일제히 고개를 젖혀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그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주 보통의 사람들의 염원 덩어리’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모두, 그저 나와 내 가족의 건강, 지금보다 쬐끔 더 여유로운 생활, 사랑하는 이와의 따스한 관계 따위의 소소한 것을 ‘소원’이라고 비는 그냥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일 뿐이니까.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며 또다시 인간에 대한 하염없는 애정이 가슴에 번졌다.
그래, 이 시점에 기다리던 해님이 아닌 난데없는 유에프오가 등장하고 외계인이 내려와 드디어 우리의 지구를 침공하게 된다면,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이기적인 행동일랑 하지 않고 한 명의 인간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놀라운 인류애를 발휘하게 될 거야. 모든 영화에서 그랬듯, 우리는 결국 그렇게 해내고야 말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길 좋아하고, 또 그 단상을 글로 적어내는 취미를 갖고 있는 나는, 올해에도 그 두 개의 마음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이 싫다’는 마음과 ‘역시 사람이 제일’이라는 마음. 그리하여 두 개의 마음 사이를 열심히, 또 겸손하게 오가며 괜찮은 균형을 찾아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근소한 차로 후자의 마음이 이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늘,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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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산행.
산악회가 불륜의 온상이라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으나, 얼마나 불순한 산행이 많으면 '순수산행'을 버스에까지 적어 놓았을까. 아프니까 청춘이고, 외로워야 중년인갑다. 사진을 본 혹자는 말하길, 깍두기 형님들이 팔뚝에 새겨놓은 '차카게 살자' 문신을 보는 듯 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