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진 Jan 01. 2024

이름에게

나를 정확히 호명하는 방식

어릴 적부터 왜인지, 이름을 불러주는 걸 참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좋아하니까…‘좋아했다’가 아니라 ‘좋아’가 맞겠지. ‘야’는 당연히 싫고,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도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주어지는 이름들, 혹은 별명들. 그런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단 하나뿐인 내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 무슨 이유였는지, 그게 유독 간질간질했다. 지금도 가끔 누군가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면, 괜히 못 들은 척 기다려보기도 한다. 한 번 더 불리우는 그 이름이 듣고 싶어서. 온전히 나를 불러 주는 그 소리, 그게 너무 듣고 싶어서. 써 놓고 보니 참...유치하기도 하네.

      대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8할은 추상적이다. 이유는 해석의 영역이므로, 결국 사후에 붙여지는 설명은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짚어가는 이 문장도 결국은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짜맞춘 것들 일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 헤맨다. 왜일까. 그건 어쩌면 정확함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라는 어느 시구처럼, 어떤 마음은 정확하게 설명되고 표현되어야만 하기에. 그건 추상적인 애정이 뚜렷한 사랑으로 실체화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니까.

      그런 이유에서 사랑은 분명 정확해야 하고, 아름다움은 표현되고 전달되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유일함은 반드시 호명되어야 한다. 입으로 나오는 것이 말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어떤 말들은 반드시 입을 통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와 당신의 귀로 흘러들어가야만 존재할 수 있다. 어쩌면 이름도 그런 류의 말 중 하나일 테고. 나의 이름을 알고, 그것을 불러준다는 건...나의 유일함을 알아주고 호명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 주었으면. 그 유일함을 애정해 주었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