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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WERTY Jul 15. 2024

복직 후 첫 출장

그토록 기다렸던, 그러나 '지금'은 아니길 바랐던

"여경, 이번 워크숍 참석 여부 회신 줄 수 있어?"


친정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 날, 수요일 아침. 나는 신경이 아주 예민해져 있던 차였다. 남편은 감기에 걸린 아이를 봐주겠다더니 자신이 발열을 포함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다. 휴가를 내고 집에서 생애 첫 감기에 걸린 아이를 보고 있던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짐을 싸서 친정으로 왔다. 아이로부터 감기를 옮은 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화가 났다. 무더운 7월, 생리는 시작되었고, 나는 하루하루 몰아치는 회사 업무 때문에 미칠 지경에도 3일씩이나 휴가를 내서 아이를 돌보는데, 아이의 감기가 끝나갈 쯤에 아이 아빠가 감기라니, 이 모든 것이 그가 평소에 건강관리를 안 한 탓인 것만 같았다.


일은 어찌나 많은지, 친정에 와서도 나는 줄곧 하루종일 일만 하느라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눈 뜨면 일하고, 자기 전까지 일했다. 친정 엄마도 감기에 콜록이며 아이를 힘들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무슨 워크숍? 나는 아차 싶어 지난 메일함을 검색했다. w.o.r.k.s.h.o.p.


지난주 연차를 낸 기간에 로드리고로부터 와 있는 메일이 하나 있었다. '설마' 하며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아뿔싸. 당장 2주 뒤에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본사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미국 워크숍을 2-3주 전에 안내를 한담?


분명 이 제안은 내가 지난 9년 동안 이 회사에 다니며 너무나 받고 싶었던 제안이었다. 미국 회사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직원이 미국 본사에 가는 일은 드물었다. 어지간하면 아시아의 본사 격인 싱가포르에서 모여 회의하면 그만이었다. 결혼 전이었던 4-5년 전에 기회가 있었는데,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회가 날아갔고 나는 다시는 본사에 갈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기회가 이렇게 갑자기, 하필 지금.


그 메일을 읽는 순간 나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를 두고 갈 생각에 심란한 마음이 쓰나미처럼 집어삼켰다. 이게 그토록 내가 갖고 싶었던 모성애일까? 아니면 내 복직 이후 아이를 전담해 주고 계시는 친정엄마에 대한 죄책감일까? 아니면 너무나 중요한 멤버로서 참여하는 워크숍이라 부담감 때문일까? 아마 셋 다였을 듯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일만큼, 나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긴급으로 떠밀리듯 매니저에게 출장 승인을 받고, 여행사 에이전시와 일정을 조율하면서도 나는 '제발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극성수기 항공편이 없는 등의 이유로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알 수 없었다.



"2주 뒤에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 단아가 일주일은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아이고, 우린 죽었다."


친정 아빠는 우린 죽었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었다. 의례히 하는 반응이었으나 그 말은 나의 죄스러운 마음을 더 짓눌렀다.


이게 워킹맘의 숙명일까.

지독히 슬픈 마음이 들었다.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내가 스스로 책임 지지도 못할 자식을 낳아, 나의 부모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남편은 아파서 앓아누워 있고,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 또 출퇴근해야 하니 아이를 돌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또다시 남편에 대한 미움이 몰아쳤다.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누구보다 남편이 불쌍하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울던 내가, 불과 10개월 만에 자꾸 남편을 탓하고 미워하게 되었다니 아이러니하다. 분명 남편은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다.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다정하고, 아직도 아이의 선물보다 나의 선물을 훨씬 더 많이 하는 남편... 인데도 이렇게 밉다니. 객적으로 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이것 또한 모성애 관련 호르몬의 농락으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도 나중에 크면 아이한테도 일 하는 엄마가 더 좋아."


미안한 마음을 조금 내비치니 친정 엄마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엄마가 일 하지 않는 엄마라 좋았다.


다만, 결혼을 하며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엄마가, 당신이 나를 가지고 키우며 힘들었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스스로 벌며 10년을 살고, 아빠의 경제적 주도권 아래 35년을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설움이 많았던 엄마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니 토 달 필요가 없었다.


그 대화를 흐지부지 끝내고 아이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카시트에서 내려달라고 울었다. 나야말로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고, 아이의 강성 울음 속에서 헛구역질만 계속하며 집으로 왔다.



아무튼 나는 이번 주말에 휴스턴으로 떠난다.

일은 여전히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이 일을 다 쳐내면서 출장 준비도 해야 하고, 아이가 이번주와 다음 주에 먹을 이유식도 만들어야 한다. 친정 엄마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외동딸의 외동딸을 돌보아야 하고, 돌도 안된 내 딸은 어디가 자기 집인지도 헷갈리게 집과 할머니 집을 오가며 자란다. 회사는 또 어떠한가. 멀쩡하게 일을 잘하던 직원이 엄마가 된 이후로 이런저런 이유들이 생기며 (내 개인으로는 훨씬 치열하지만) 예전보다 느슨해졌다 생각할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육아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인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든다.


단순히 일을 유지하면서도 아이 하나쯤은 스스로 충분히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획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게 된 느낌.


그러는 와중에 주말 사이 아이는 두 손을 포개어 내밀며 '주세요' 하는 동작을 배웠다. 한 번 익히더니 과자를 달라고 할 때도, 이유식을 달라고 할 때도, 안아달라고 할 때도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주세요' 하는 동작을 한다. 이게 이렇게까지 사랑스럽고 신기하다니.


이렇게 저렇게 시간은 가겠지. 아이는 자라겠지.

무엇으로 내 마음을 달래고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혼란스럽다.


나는 도대체 출산 후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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