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크를 해두고 가끔 꺼내보는 글이 몇 편 있다. 이슬아 작가의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와 김영민 작가의 <인생의 디저트를 즐기는 법>이 그렇다. 분명 나도 떠올려본 적이 있던 생각이 작가의 문체로 정리되어 있다. 자기 경험을 엮어 풀어낸 글을 읽으면 딱 이런 말이 나온다. 정말 멋들어지게도 썼구나. 크~ 정말로 좋다 싶은 글을 읽고 나면 뭐라도 쓰지 않고는 못 참겠다. 그러면 얼른 책상으로 가서 앉게 된다.
여태껏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읽고 듣고 보며 살아왔다. 다음 화가 궁금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가며 드라마를 몰아본 적도 있고 훌륭한 영화를 보고 며칠을 잠 못 이루기도 했다. 매일 유튜브를 헤엄치며 볼만한 영상을 찾고 일주일에 꼬박 두 번은 좋아하는 웹툰이 올라오길 기다린다. 음악은 또 어떤가.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만큼 정말이지 없어서는 안 되지 않나. 두루두루 창작의 영역을 즐기면서도 그 어느 하나 직접 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이를테면 재밌는 드라마를 보고 '아.. 도저히 안되겠는데...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야겠어'라거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하.. 이거 참을 수가 없는걸. 당장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잖아!' 같은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잘 차려진 창작물을 마음껏 즐기면 그걸로 더할 나위 없었다.
그야말로 향유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글을 마주할 때면 딱 그만큼에서 끝나지질 않았다. 저런 글을 한 편이라도 써내고 싶은 욕심이 솟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꾸만 뭔가를 쓰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무슨 바람이 어디에서 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작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써 내려간 원고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자 난생처음 '떡잎' 같은 걸 봤다. 좋은 글을 만나면 못 견디게 쓰고 싶어진다는 건, 결국 글을 쓰며 살고 싶은 건 아닐까. 얼마나 대단한 글을 써낼 수 있는지 나의 가능성이 얼만큼인지 같은 건 하나도 모르지만 해보고 싶다는 게 중요했다.
성공한 이들이 남긴 말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멘트는 빠지지 않고 늘 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말을 들으면서 늘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포기 안 하고 꾸준히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다. 무엇을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지는 인생에는 동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잘하는 건 뭘까, 하물며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알지 못했으니 앞날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시도해 보고 싶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기는 충분했던 것이다.
마음을 먹고서도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왕왕 고민했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기다리자니 기약이 없었다. 영영 그 시점이 안 올 수도 있었다. 뭐 어차피 작가 자격증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남이 시켜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작가로 만들어주겠다는 목표로 시작했다. 원고를 더 촘촘히 모은 후에 출판사를 차렸고 책을 출간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주체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책을 내면 그래도 작가가 되는 거 아닐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그게 내 인생에 첫 발판은 되겠거니 했다. 기대와는 달리 책을 내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내 삶에 큰 변화 같은 건 없다. 오히려 팔리지 않는 책의 재고를 걱정하며 창고 비용을 꾸준히 치르는 수고만 더해졌다. 책을 만들기 전에는 독립출판 작가를 동경했었는데, 어째서 그 일은 내가 해내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을까. 누구나 후다닥 해낼 수 있는 낮은 난이도의 일 같기만 하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걸까.
읽는 사람은 없고 쓰는 사람만 계속 생겨난다는 출판업계에서 돋보일 수 있을지 계산해 본다. 유명인이 아니면 주목도 못 받고 미끄러져 버리는 이 세계에서 과연 밥벌이라도 해낼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책을 내놓으면 당당해지고 자부심도 생길 줄 알았다. 그런 건 고작 책 한 권을 만든다고 저절로 샘솟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인 채로 여전히 똑같다. 상황이 나아지면,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이런 가정 같은 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 자체로 행복하지 않다면 그 무엇을 가져다줘도 행복해지지 못할 거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도 통한다.
그럴지라도 이 질문만은 끝내 남는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계속 이대로 이런 채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 정체성을 잃을 때면 매일 매일 한 줄이라도 쓰자고 다짐하지만, 그 마음마저 꺾여버리고 실패하는 날이 더 많아서 자주 휘청한다. 아무것도 써내지 못한 오늘의 나도, 책 같은 건 낼 엄두도 못 냈던 작년의 나도, 어쩌면 운이 좋아 2쇄를 찍는 작가가 된다면 훗날의 나도, 그냥 나일 뿐이다. 여전히 그냥 나지만 어깨를 펴고 종종 연습한다. "저는 책을 한 권 출간한 작가입니다."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더는 쑥스러워하지 않도록 뻔뻔함을 장착해 보는 거다. 누가 뭐라든 나부터 나를 믿어야 뭐라도 되겠지 하는 자신감을 담는다. 그런 마음가짐만이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다고 믿어서다. 그런 믿음만이 나를 계속 쓰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