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좋아했었다.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다정한 말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예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잘 열었다. 아,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말을 예쁘게 하지? 다정하고 달달한 어투 하나로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덜컥 믿곤 했다. 반대로 지나치게 솔직하고 건조한 말투는 나를 멈칫하게 했다. 무한도전의 박명수 화법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박명수는 당차게 출연료 인상을 요구하고 지쳤을 때는 일하기 싫다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과거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왜 저럴까 싶어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람은 무지할수록 편협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부드러운 말과 행동이 한 사람의 전부를 대변해 주지 않는 건데. 인생은 결코 1+1=2라는 공식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말이 좀 거칠어도 속은 한없이 여리고 따뜻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종종 봤었다. 박명수만 봐도 그랬다. 그는 쌀쌀맞은 말투와 다르게 의외로 약한 사람들을 잘 돌보고 기부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의 민낯이 더 추악할 때도 많았다. 인생이 단순하지 않은 만큼 한 인간의 모습도 꽤 복잡한 것이다.
이런 오해와 편견은 결국 나의 모자람에서 시작됐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술을 멀리할 것 같았고, 한 회사를 꾸준히 다닌 성실함을 갖췄다면 그 사람은 분명 따뜻할 것 같았다. 취미로 피아노를 즐기면서 클럽에 놀러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내 방식대로 연결 지은 오해들은 꽤나 많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좋은 가치는 좋은 것끼리 나쁜 가치는 나쁜 것끼리 묶인다고 여겼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엇이 좋은 가치이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라는 점을 일러둔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편견들은 곧잘 부서졌다. 독서 모임이 끝나고 대낮부터 술을 들이켜는 회원을 볼 때나, 애인에게 툴툴거리면서 회사에만 충성하는 사람을 볼 때 그랬다. 피아노를 즐기면서도 유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를 보거나 반려견을 꼭 끌어안은 채 발로 빈 캔을 툭 차버리는 주민을 목격할 때도 그랬다. 애초에 내가 그려 둔 편견들은 그 어느 하나 서로 상관관계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술을 좋아하면 왜 안 되는가? 애당초 건전하게 술을 즐기는 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나. 자신의 업무에는 성실한 사람이 왜 꼭 애인에게도 다정해야 하는가? 연인보다 본인 일이 더 소중한 사람이라면 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내 안에서 얽히고설킨 오해들이 풀어질 때마다 나는 몹시 어려웠다. 인생은 대체 뭘까, 인간은 정말 뭘까. 어떤 작가는 산다는 게 늘 뒤통수를 맞는 일이랬는데, 내가 꼭 그런 기분이다. 언제부턴가 착한 말투 하나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단정 짓지 못하게 됐다. 그렇다고 '저 사람의 본모습은 저게 아닐지도 몰라' 의심하고 경계해서 얻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을 뿐이다. 왠지 그 사실을 떠올리면 이따금 쓸쓸해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