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현 Aug 10. 2023

한 번 뿐인 인생

낮은 출산율과 함께 육아의 고됨이 거론될 때마다 나는 홍고망 여사를 떠올린다. 홍 여사는 4남매를 둔 엄마이자 동시에 7명의 손주를 둔 할머니다. 그녀는 자기 자식을 키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식의 자식까지 도합 11명의 육아를 혼자서 해냈다. 첫 외손녀인 이지현을 시작으로 막내 손녀 장예린까지 총 7명의 손주를  키워낸 것이다. 덕분에 나의 엄마는 육아 쪽으로는 한 톨의 경력도 없다. 혹여나 맡게 될지도 모르는 육아가 걱정됐는지 '내 자식도 키워본 적이 없으니 나중에 아이를 맡길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미리부터 선언해 왔다.


홍고망 여사가 나를 어떤 정성으로 먹이고 입히고 보살폈는지 나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다만 막내 손녀를 키워낼 때 직접 본 정성을 자료 삼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한밤중에 깨어나 젖을 먹이면서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신기하고 희한한 것은 할머니 품이 아니면 잠도 못 들던 손주들이 3살만 되면 귀신같이 제 엄마를 찾아 떠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홍 여사가 육아의 비법을 전수하듯 건넸던 말이라 기억하고 있다. 밤낮으로 열심히 길러낸 손주들이 하나같이 제 엄마를 찾아 품을 떠났을 때 홍 여사는 후련했을지 아니면 조금은 공허했을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까.


근 몇 년 동안 친구들의 출산이 줄줄이 이어져서인지 사방에서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를 잃는 것 같아서 둘째는 절대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친구를 보며 홍고망 여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명을 키우는데도 사력을 다해야 하는 육아를 도합 11번이나 해낸 그녀의 강인함에 대해서. 길러준 은혜를 떠올릴 때면 나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오직 할머니가 먼저였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급하게 시골로 내려가던 새벽 날, 아빠는 이런 문자를 보냈다. "얘들아 운전 조심해서 오고 와서 할머니 위로 많이 해드려라. 니네들 키우느라 할머니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조심해서 와~" 두고두고 이 문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할머니의 공을 알아주는 아빠의 마음이 새삼 감격스러워서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할 리 없는 건데. 왜 나 말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넘겨짚었는지 모르겠다. 외할아버지가 떠난 후 홍 여사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이 약해졌다.


고향에 갈 때마다 들르는 홍 여사의 집에는 이제 남편도 없고 4명의 자식도 7명의 손주도 없다. 그저 할머니 혼자다. 할아버지가 있을 때면 늘 켜놓던 TV도 치워버리고 누워있곤 한다. "뭐 하는데 불도 안 켜놓고 누워있어?"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목을 가다듬는다. 우리를 보면 반가움에 잠시라도 몸을 일으키지만, 식어버린 삶에 대한 열의까지 살아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느 날엔가는 내가 혼자 가서 그런가 하고 꼭 남동생을 데리고 가보지만 예뻐했던 손자의 존재도 별로 힘이 없어 보인다. 동생 탓은 아니지만 괜히 부아가 뒤집힌다.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냐 왜 이렇게 능력이 없어?" 홍 여사의 슬픔에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손주들이라면, 7명을 키워낸 세월이 덧없는 건 아닐까. 이럴 때 도움도 안 되는 손주들이라면 대체 그 오랜 시간 동안 왜 보듬었단 말인가.


전기세 아끼지 말고 불 좀 켜놓고 있으라고 할머니를 구박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런 생각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깜깜한 방에 혼자 누워 남편을 그리워하며 잠드는 밤이 계속될 때 홍고망 여사의 심정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자식이고 손주고 다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간혹 하기도 할까. 한평생을 '홍고망' 본인으로 살아본 세월이 없는 여자의 밤은 어떤 생각들로 채워질지 나로서는 도무지 그릴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식을 돌보는 것으로 모자라 7명의 손주까지 길러낸 시간을 온전히 본인에게 쏟아부을 수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까지 될 수 있었을까. 어제는 문득 전생처럼 느껴지는 과거가 떠올랐다. 내가 막 상경해서 대학생의 옷을 입고 서울 한복판을 누리던 시간 말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새로 사귄 친구와 팔짱을 끼고 명동에도 가보고 강남역에도 가보던 시간. 예쁜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마음껏 돈을 쓰며 보내던 값진 세월을 홍 여사가 똑같이 살아볼 수 있었다면, 과연 그녀의 생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누워있는 채로 남아있기만 할까. 내가 경험했던 넓고 다채로운 세상을 홍 여사가 꼭 한 번이라도 살아볼 수 있으면 어땠을지. 내 인생을 되짚어 보며 무수히 가정법을 띄우고 과거를 아쉬워했던 것처럼 무턱대고 홍 여사의 인생에 가정법을 그려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셈이 되지 않아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할머니의 밤을 상상하다 보면 나는 과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것인지, 그런 게 정말 있긴 한 건지 잘 모르겠을 뿐이다. 지금보다 더 고왔던 값지고 귀한 시절에 별다른 의문도 없이 육아에 몰두한 시간을 만약 보상받을 수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이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구도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다는 게 조금 섭섭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신보다 더 무서운 접촉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