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전철로 53분이면 서울에 갈 수 있고, 경부고속도로와 평택-제천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교통 인프라가 편한 곳이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부품 등 산업이 발달한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삼성디스플레이, 삼성 SDI, 현대 자동차등 대기업이 있어 일자리 창출 및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이십 대 초반에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내 커플에서 사내 부부로 13년간 출, 퇴근을 함께 했다. 부서는 달라도 그룹이라는 조직은 같아서 하루 24시간을 붙어있는 꼴이었다. 함께 다니니 보조석이 늘 내 자리로 운전대 잡을 일이 거의 없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업무 고민이 생기면 남편과 상의했다. 회사에서 만나 헤어지기라도 하면 뒷감당이 어려워 꺼리는 게 사내 커플이라지만, 내게는 사내 부부라서 얻는 득이 많았다.
천안을 와보지 않은 사람도 '천안 삼거리''독립기념관''현충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우리 집은 천안삼거리 공원에서 가까웠다. 신혼 초엔 옆 동네에 분양받아 살다가 둘째 출산쯤 이사했다. 주말이면 내 집 드나들듯 아이들 데리고 독립기념관을 다녔다. 집에서 가족이 자전거 타고 정문까지 다녀오기도 여러 번이다. 특히, 우리 가족은 가을에 열리는 '천안 흥타령'을 무척 애정했다. 국제 춤 경연축제로 매년 천안 삼거리 공원에서 열리는데, 스무명 넘는 거대한 인원이 현대식으로 각색한 한국무용을 보는 건 황홀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집에서 가까워 걸어서 가면 됐기에 주차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불꽃놀이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비현실적 구름
남편과 함께 출퇴근하고, 세 아이 키우고, 주말이면 캠핑 가거나 자전거 타는 생활은 내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대기업의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잦은 출장, 업무 갈등과 매너리즘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삶은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마치 내 삶은 저울에 올려진 듯했다.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져 복구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직장 다니는 게 죽도록 힘들지만, 돈 때문에 놓을 수 없어 하루하루 버텼다.
직장 생활 13년 차. 균형을 유지하며 겨우 버티는 삶에 이슈가 발생됐다. 남편에게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왜 삶이 변화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지금의 변화는 옳은 것일까?
혼자 세 아이 키우고, 직장 다니는 걸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이직 제안이 들어온 곳은 '인천'이었다. 출퇴근 가능한 거리가 아니니 주말부부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남편은 반도체 직종에 대한 깊은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을 때였기에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누가 봐도 가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 상황이었다. 대기업이니 나쁘지 않은 월급과 우수한 복지 혜택과 아내와 같이 다니고 있었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으니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싶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미래를 생각하면 가는 게 옳은 선택 같았다.
수도권으로의 편입, 다른 업종의 일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더 큰 조직에서의 생활이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일단 해보고 못하겠으면 그때 가서 방법을 찾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남편은 인천으로 떠났고, 더 빨리 일어나 세 아이 챙기고 출근하는 삶이 나를 기다렸다. 주말부부로 지낸 시간은 2년이다. 솔직히, 내겐 2년의 기억이 희미하다. 마치 기억을 상실한 환자처럼 나의, 아이들의, 가족의 일상이 잘려나갔다. 듬성듬성 떠오를 뿐, 세세하게 생각나진 않는다.
남편과 13년, 홀로 견딘 2년. 총 15년의 천안 생활을 접고 2018년 인천으로 이사했다. 바람 따라 섬으로 들어온 지 6년이 되었다. 15년이란 직장 경력도 무용지물이었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나는 다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모든 걸 새롭게 일궈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