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밴으로 돌아보는 호주: 맥카이(Mackay)
예푼(Yeppoon)에서 맥카이(Mackay)까지 가는 길은 삭막한 편이다. 차창밖으로는 허허벌판과 사탕수수밭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마을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 끝자락에 보이는 산들이 그나마 볼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지루한 길이 계속되어서일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문구가 도로에 있다. 흔히 고속도로에서 볼 수 있는 졸음운전 혹은 과속을 경고하는 문구가 아니다.
처음에 보이는 문구는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 질문이다. “아빠 얼마나 더 가야 해?”라는 질문을 도로변에 설치해 놓았다. 얼마 정도 달리니 다른 문구가 나온다. 이번에는 엄마에게 하는 질문이다. “엄마 얼마나 더 가야 해?” 아빠가 운전하느라 대답하지 않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잠시 5분 정도 더 달리니 엄마의 대답이 나온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가족 여행에서 흔히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도로에 적어 놓았다. 웃음을 머금게 한다.
동네가 자주 나오지 않는 지루한 도로를 달린 끝에 맥카이 야영장에 도착했다. 이번 야영장은 해변과 붙어 있다. 해변 가까운 자리를 달라고 하니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한다. 돈을 조금 더 주고 바다를 볼 수 있는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지루한 운전으로 피곤해진 몸을 달랜다.
바다 앞에서 지내다 보니 아침마다 일출을 본다. 아침마다 보는 일출이지만 똑같은 일출은 반복되지 않는다. 항상 다르게 다가오는 일출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침 일찍 해변을 걷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걷기도 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지내는 삶을 경험한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행이란 구경거리를 찾아다니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와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다.
오늘도 바다를 보며 야영장에 앉아 있는데 시끄러운 새소리가 난다. 호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앵무새의 일종인 커카투(Cockatoo)다. 서너 마리의 덩치가 큰 까만 커카투가 나무와 아스팔트 위를 오가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얀 새는 자주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까만 커카투는 이곳에서 처음 본다. 처음 보는 것에는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다. 카메라에 담는다. 여느 호주 동물처럼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오늘은 평소에 좋아하는 식물원을 찾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으로 붐빈다. 식물원 입구 잔디밭에는 사람이 많이 몰려있다. 담소를 나누기도 하면서 인사를 주고받는다. 행사가 막 끝난 분위기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식당에 들어섰다. 그러나 오늘 단체 손님 주문 때문에 손님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고 하며 양해를 구한다. 시야가 트이고 분위기 있는 식물원이라 행사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식사를 포기하고 잠시 식물원을 돌아본다. 여느 식물원과 다름없이 꽃과 나무 그리고 분수가 솟아오르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다른 식물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늪지대를 연상시키는 넓은 호수다. 식물원도 넓다. 걸어서는 다 둘러볼 수가 없을 정도다. 호수가 보이는 잔디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보인다. 동양 여자가 어린아이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너른 식물원을 달리는 가족도 있다. 한가한 주말을 보내는 호주의 전형적인 삶을 만난다.
나도 경치 좋은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주위와 하나가 되어 본다. 인공적인 것이 많지 않아 마음에 드는 식물원이다. 꽃과 식물 그리고 넓은 호수, 이러한 곳에서 지내는 삶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대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맥카이 시내를 찾았다. 제일 먼저 동네 정보를 제공해 주는 관광안내소(Tourist Information Centre)를 찾아 가보았다. 찾아간 관광 안내소는 도시에 비해 규모가 무척 작았다. 자그마한 창구에 직원이 앉아 있고 창구 앞에 관광 안내 팸플릿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인터넷이 있어 관광안내소를 없애야 한다는 정치인의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관광안내소는 수영장 입구에 있다. 수영장에 들어가 본다. 입장료는 없다.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일까, 아직 물놀이하는 사람은 없다. 잔디에 앉아 책읽는 여자 한 명이 수영장 손님의 전부다. 그러나 직원 서너 명은 수영장 근처를 서성이며 근무하고 있다.
수영장 규모가 크다. 어린이를 위한 수영장, 성인을 위한 수영장 그리고 아이들이 물놀이하며 뛰어놀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직원 월급을 비롯해 유지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을 위해 사용하는 돈을 낭비라고 다그치는 시민은 호주에서 보기 어렵다.
수영장 옆으로는 긴 강(Pioneer River)이 흐르고 있다.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산책로가 멋있게 조성되어 있다. 걷는 것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산책로를 걸어본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난간이나 의자에서 새것 냄새가 난다. 산책로 중간중간에는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 강을 바라보며 쉴 수 있다.
산책로 옆으로는 아담한 아파트 서너 동이 줄지어 있다. 강물이 발아래에서 흐르고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있는 주거지다. 아침마다 산책로를 걸을 수도 있다. 맥카이에 정착한다면 이곳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강을 따라 계속 걸으니 산책로는 강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끝없이 계속되는 산책로다. 시간이 많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숲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책로를 계속 걸어 들어간다. 한적하다. 땀을 흘리며 뛰어가는 젊은이 한 사람을 본 것이 전부다.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캐시 프리맨 산책로 (Catherine Freeman Walk)라고 쓰여 있다.
캐시 프리맨이라고 하면 호주에서 영웅시되는 원주민 달리기 선수다. 서부호주(Western Australia)에서 원주민을 위한 기숙사에 자원 봉사자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대다수 원주민 아이들은 럭비 선수가 되거나 캐시처럼 달리기 선수가 되는 것을 장래 희망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유명한 원주민 럭비 선수와 캐시의 영향 때문이었다.
캐시가 호주 국민에게 각인된 정점은 시드니에서 열린 2,000년 올림픽이라고 생각된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4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호주 사람들은 원주민 캐시에 열광했었다. 혹시 맥카이 동네와 관계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캐시가 태어난 곳이 맥카이다. 캐시의 이름을 딴 산책로를 만든 이유를 알 것 같다.
문득 시드니 2000년 올림픽이 생각난다. 남한과 북한이 아리랑 주악에 맞춰 한반도기를 함께 흔들며 입장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북한이 하나 되어 입장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금강산 구경도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오늘의 한국을 생각한다.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의 경제적 발전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대립관계가 계속되는 한 한국의 발전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순간의 오판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최우선 과제는 어떻게 북한과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자비’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한반도에 사랑과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