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씨는 주방에 엎어져 자고 있다. 세탁기가 다 됐다고 띠링띠링 알릴 때도
세탁물을 말리기 위해 발코니 문을 끼익 열 때도 깨지 않은 채 특유의 평온한 얼굴로 잘잔다. 순간, 드라마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나의 올드독, 드디어 편안한 잠에 드는구나.
어제 오후 다섯 시, 집 나간 지 30시간 만에 돌아왔더니
현관에 있던 살구는 어리둥절한 물개표정을 2초 정도 짓다가 온몸을 흔들며 반긴다.
어젠 이상한 소리까지 냈는데 - 어응 이이잉 끄응- 사뭇 아이가 내는 옹알이소리와 흡사해 살구가 조만간 말을 할 수 있겠단 생각을 2분이나 했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돋았던 ‘과로하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라는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어서 잠시 침대에 눈을 붙였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 살구 산책을 나갔다.
그제 밤과 어제 아침엔 친구가 나 대신 산책을 시켜주면서 산책 사진을 보내줬는데 둘 다 즐기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살구는 역시 나와 하는 산책을 좋아한다. 어차피 킁킁 냄새 맡고 오줌싸고 똥싸고 하는 거면 누구랑 해도 너한텐 이득일 텐데.- 라는 인간다운 생각을 하며 애 옆에서 걷는데, 이 마음을 절대 알리 없는 애는 웃으며 실룩실룩 졸래졸래 사랑스로운 몸짓으로 돌아다닌다.
오줌싸고 똥싸는 공간은 개에게도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오늘은 집정리를 해야 하는 날.
아침 6시에 일어났지만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는다.
쉬는 날이니까 누워서 폰으로 의미 없는 것들을 메뚜기처럼 보다가 오늘자 흥미를 돋우는 가내수공업의 계정을 좀 염탐했다. 소중하게 생긴 손수 카빙한 물건들을 구경하며 오늘 집정리하고 오랜만에 칼도 갈고 나무도 깎기로 마음먹었다.
그랬지만.
나에겐 순서대로 따다닥 하는 효율적인 집정리란 가장 어렵다.
집정리 시작하기 전에 무화과가 먹고 싶었다. 기운이 달릴 때마다 어릴 적 먹던 음식이 떠오르는 건 뭘까?
무튼 무화과처럼 약하고 무른 과일, 특히 농약으로주터 지켜줘야할 애들은 어디서 사야 하는 지부터가 고민이다.
안 그래도 제철과일이 먹고 싶을 때 고민하지 않고 달려가서 사 먹을 수 있는 과일가게가 있으면 싶은데 없다.
시장에 자주가도 마음 놓고 의심 없이 살 수 있는 가게를 못 만났고 (못 만났단 거지 아예 안 사 먹는 건 아니요.) 두레생협은 과일이 좋지만 간혹 아주 비쌀 때가 있고(그럴 수 있죠! ) 전부 미리 포장돼 있어 (이건 좀!) 아주 가끔만 이용한다.
가장 편하고 좋은 건 인터넷 주문인데, 시중에 구하기 어려운 애들을 맛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거 하나 먹자고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싶진 않다. (그 마음 구겨서 버리고 싶을 때가 요즘 자주 오네!)
편하게 살려고 하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는 매끄러운 사회 속에서 뭐 하자는 거지라는 생각도 들지만 거기에 휩쓸리면 좀처럼 못 돌아올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좀 여력이 있으니까.
알맹상점에서 내일 무포장 무화과를 판다고 하지만 오늘 먹고 싶으니까.
시장에 가서 한 박스를 사 온다.
사 오면서 맘에 드는 과일가게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내가 내버릴까? 하다가 경리단 아파트 올라가는 길 딱 하나 있던 과일가게 떠올랐다.
과일이 참 실했었지만 건축하는 초년생에겐 비싸서 자주 못 사 먹었던 그 과일가게. 그랬는 데도 과일아저씨와는 매일 인사하는 사이었더랬지..
집안일을 하자.